부산서 청주로 올라와서 청주에서 살때의 집. 명색이 청주상업고등학교의 사택으로
 학교뒷마당에 있었는데 조그만 방두개의 흙벽돌집이었다.


청주고등학교의 같은반 친구로, 앞줄의 내오른쪽이 웅구엄마의 오빠인 임구혁.


청주고등학교 시절인 1953년에 청산의 냇가에서 있었든 청산국민학교 동창회로 시골 처녀가 많이 보인다.


청주고등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1954)


실수로 입학한 서울대학교 신입생

나의 서울공대입학은 단순한 실수의 결과였다. 원래는 인하공대 시험을 보러 집에서 나왔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서울공대 시험을 치루고 집으로 왔다. (자세한 경위는 제3부 "나의 경험담"에 있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1학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기공학과와 전자공학과 학생이 주로 모인 아마추어무선 동호인 클럽 (LCR Club).


내가 대학다닐 때에 살던 미아리 (정식 명칭은 길음동) 집. 왼쪽 아래는 서울사대부고를 디니든 성구, 어머님, 동현누님과 나, 그리고 내가 안고 있는 아이는 동선누님의 장남 기모.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귀든 펜팔중에 서독의 방직회사 공장장을 하든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 내가 서독유학을 가고싶다고 하였드니 자기집에서 숙식은 제공하겠다고 하여, 독일유학을 추진하였고, 어렵게 슈틋트가르트 공과대학의 입학허가를 받고 막 여권신청을 하려는데 병역을 필하지 않으면 유학을 불허한다는 새로운 정부방침이 결정되어, 유학수속을 하든 대학생이 전부 자원입대로 군대에 들어갔고, 나도 그중의 하나로, 미국유학을 위하여 수속중이든 동익이와 함께 자원입대하였다. 이사진은 논산훈련소의 신병훈련 때의 사진들이다.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돌아오니, 서독의 펜팔이 병이들어 퇴직하여 숙식제공이 어렵겠다고 하고, 당시 서독은 미국과 달라 알바이트로 돈을 벌수도 없다고하여, 결국 유학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


대학당시 미아리집에서 신공덕동 서울공대를 가려면, 돈암교-신설동 뻐스를 타고, 신설동에서 뻐스를 갈아타고 청량리 까지가서, 거기서 신공덕 뻐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통학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요새 같이 뻐스가 자주 오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대 바로앞에 있는 토담집의 한평반짜리 이방을 빌려, 세끼 밥은 공대식당에서 먹으면서 마지막 2년을 다녔는데, 공대식당에서 당시에는 돈까스가 제일 많이 팔려서 이것을 제일 많이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돈까스가 제일 많이 남아서 저녁밥의 90% 이상은 돈까스를 주었고(팔다 남은것을 주었기 때문에), 때로는 점심까지 돈까스를 주어, 돈까스 2년의 생활이었다. 여기서도 BC-342라는 미군의 불하품인 단파수신기를 갖어다 놓고 아마추어무선의 통신을 수신하고 있었다.


할아버님의 장손의 부인 환갑날 모인 조씨일가의 사진으로, 이것도 전가족의 일부에 불과하였고, 지금은 할아버님의 자손만으로 100명을 훨신 넘는 대가족으로 번창하여 세계의 여러곳에 살고 있고, 성공한 사람도 많으나, 옛 선비집안이라 그런지, 정계에 나간사람은 한사람도 없고, 주로 의과, 공과, 교육계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