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의 경험   

 

1958년 9월에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이곳 저곳을 2년간 전전하다가, 당시 금성사 상무였든 둘째매부의 망내동생인 박승찬씨 힘으로 금성사에 입사한것이 19609월이었다. (금성사 이전은 전부 임시직장이었고, 금성사 입사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였으며, 그때는 전부 이렇게 연줄 연줄로 들어 갔지 요새같이 공채시험이라는것이 없었다).

그때의 금성사는,럭키화학을 모회사로, 창설된지 3-4년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한 기억이없고, 최장 5년을 넘지 못한 회사였었으며, 부산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있어, 부산 서면에서 하야리아부대라는 미군부대옆을 지나, 차두대가 가까스로 스칠수 있는 연지동 좁은길을 한참 들어가면, 럭키화학 맞은편에 있었다. 그때의 금성사 종업원 총수가 여공 포함해서 천명도 안되었지 않나 생각되는데, 혹시 천명은 조금 넘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만든 회사니까, 한국 최초의 전자산업 회사로, 익살맞은 친구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데부산시 금성라디오 만드는곳"하고 주소를 써보냈는데도 제대로 배달이 되었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라디오를 생산하려니까, 이론만 공부한 대학출신 갖이고는 일이 안되겠어서, 기술사원이 전부 고교나온 라디오방 출신이었고, 이론은 제처놓고 라디오 수리하든 기술로 일본과의 기술계약도 없이 독자적 힘으로 라디오를 만들었으니까, 빠른 시일내로 생산은 할수 있었지만, 엉터리 라디오일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60년의 한국에서는, 제대로된 측정기 하나도 살수 없다보니까, 측정기라는것이 고작 라디오 방에서 쓰고있든 전압/전류/저항치나 재는 미군 불하품 테스터라는것과, 역시 미군 불하품인 2인치 오실로스코프 몇대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다보니까, 라디오를 만들어 조정을 하고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일본이 가까워 일본방송이 많이 들어 오니까 이것을 수신하여 귀로 들어가면서, 조정도하고 감도 좋다, 음질이 나쁘다라며 판정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어콘이 있는것도 아니고, 겨울에는 스팀으로 난방이 그저 추워서 작업 못하지 않을 정도로 들어 오는것이 고작이라, 만든 라디오를 아침에 조정한것과 낮에 조정한것이 달랐다. 실내온도에 따라 내부의 부품이 팽창도하고 수축도하니까 전기적인 특성도 변하는데, 워낙 실내온도차가 아침과 낮이 달르니까 그럴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라디오를 만들어 국내판매를 하는 회사였고, 외제 라디오는 워낙 비쌌으니까, 장사는 잘되었었다고 기억한다. 지금 한국의 전자공업과는 비교조차 할수가 없는, 문자그대로 전자공업의 단군시대라고나할까, 정말 호랑이 담배피우던 때의 현항이었다.

이런 금성사에 전기전자과 대졸 사원 1호로 입사하여 "라디오설계실" 주임으로 일을 시작하였는데 (주임이라면 무슨 감투나 쓴것 같아도 실제는 기술직 평사원을 주임이라 했다.), 설계실에는 이미 모두 라디오방 출신의 주임이 4-5 있어, 과장도 없이 모두가 공장장 직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막상 라디오설계를 하려니, 옛날에 집에서 라디오 몇번 고첫다 부셨다하든 실력으로는 택도 없었다. 말이 서울공대 출신이지, 전기과를 졸업하고, 전자과 공부는 선택과목으로 하다보니, 전기과 과목도 전자과 과목도 양쪽 모두 제대로 공부를 못하고 말았고, 이래서 설계실근무가 부담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 이것 못하겠오" 할수도 없고, 하기는 하면서도 통신공학과에 못들어 간것이 또한번 한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게다가 공부좀 할려고, 책을 한열권쯤 사달랬드니, 공장장 말씀이남이 갖이고 있는것 갖어야 일을 할수 있으면 그게 무슨 기술자요. 남은 있어도 그런것 없이도 일을 할수있어야 기술자지"하는데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안나왔었다. 그때의 금성사가 그런 회사였다.

누가 손잡고 가르처 사람도 없고, 일제 라디오 하나를 모델로 완전히 분해하여 놓고 흉내를 내서 설계를 하는데, 선배 주임에게 물어보니라디오는 이론대로는 안되니, 이론으로 따질 생각은 하지도 말고, cut and try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여러가지로 해봐서 제일 좋은것을 찾아야한다" 하며, 아예 이론은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학에서 배운것도 있는데, 라디오방 출신하는것을 그대로 따를수는 없지 않겠나?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반년 이상을 끙끙거려 그래도 A-503이라는 모델을 하나 설계하여, 생산으로 넘겨서 생산도 하고 시중에 판매도 했지만, 별로 성공적인 제품도 아니었고 많이 팔리지도 않은것 같다.

무렵에는 이미 라디오가 진공관식에서 트랜지스터로 전환되는 초기과정이었고, 금성사에서도 여러개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시판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동료 주임집에 하숙을 하고, 주말만 되면 뻔질나게 서울로 가서 데이트를 하고 내려 왔는데 (요새 주말부부가 그런것 아닌지 몰라도, 한참 열이 나서 데이트를 하든 때니까, 아마 내가 요사이의 주말부부 보다도 자주 서울을 간것 아닌지 모르겠다.), 주말이라야 일요일 하루 밖에 없으니까, 토요일 밤차로 서울로 가서 일요일 밤차로 내려 오고, 그길로 출근하는, 힘드는 데이트였다. 그러나, 19609월에 입사하여, 615월에 약혼을 한후에는, 마음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데이트였으니까, 장래 처가집에 가서 함께있어도 떳떳했고 (그전에는 밖에서만 데이트를 하려니까 피곤했지만), 거이 매주말마다 서울을 다녀왔고, 62 4월에 결혼할 때까지 거이 일년을 이렇게 지났다. (나중에는 야간 침대열차가 생겨, 기차가 많이 편해젔지만, 그대신 기차값으로 돈께나 없앴다.)

그러면서 그럭저럭 회사를 다니다가, 19624월에 결혼하고, 서면에 단간방 세내서 신혼살림이라고 차리고 나니, 무엇보다 서을 들랑거리지 않어 정말 편해젔고, 하숙집에서 매일 먹여주든 맵고 짜기 유명한 부산 음식 안먹으니 살것 같았다. 집사람은 약대를 나왔다고 면허증 놀리기 아까워서 셋집 가까이 점방 하나를 세를 내어, “성일약국" 이라고 약국을 차렸지만, 만날, 틈만 있으면 놀러 다니느라니까 면허없는 약사를 두고 장사를 하면서, 내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의 소일거리는 됬어도, 돈버리는 안되었었다. 그당시는 월급만으로 생활하기가 무척 힘든 박봉시대라, 가불이라는것이 성행했었는데, 신혼살림 시작하면서 금성사에서 3만원을 가불한것이, 월급 타서 일부 갚고 가불하고, 다음 달에 갚고 가불하고, 결국 금성사 고만 때에야 모두 갚고 나왔었다.

그런데 신혼살림 차린지 얼마 안되어, 금성사가 독일의 지멘스와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가정용 적산전력계 (각가정에 붙어있는 전기사용량 기록기) 만들기로 했는데, 계약의 일환으로 120만불의 차관을 얻었었다. 지금은 차관 120만불이 같지도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동명목제가 한국 최초로 일년에 100만불 수출했다고 “100만불 수출탑"이라는것을 정부에서 받고, 금탑산업훈장을 받든 시대니까, 120만불은 돈이었다. 이무렵은 한국에서 TV방송이 시작되어, 흑백이었지만 TV 수요가 생겨나는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금성사가 지멘스와의 계약조건에, 120만불중 90% 설비와 부품을 지멘스에서 사는데 쓰되, 10% 지멘스 이외에서 사도 된다는 조건을 집어넣고, 10% 12만불로 일본의 히다찌와 기술계약을 맺어, 히다찌 TV 금성사에서 만들어 팔기로 하였었다. (비밀리에 비공식적으로)

이래서 금성사에서 6명의 기술사원을 선발하여 일본 히다찌로 보내어 3개월의 훈련을 받기로 하였는데, 나는 “TV설계" 담당이라는 직책으로 그릅에 끼게 되어, 라디오설계실에서는 빠저나와 프로젝트 전담팀속에 끼게 되었고, 여권수속을 시작하였는데, 거주지 신원조사에 본적지 신원조사하는데 3-4개월 걸렸고, 외무부 여권수속이 2-3개월걸려, 반년이상이 걸려서야 겨우 여권을 받을수 있었다. 그당시는 외국여행은 높으신 분이나 할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 갓나온 우리 같이 젊은 사람이 해외여행한다는것은 꿈같은 일이라서, 여권이 나올 무렵이 되어서는, 이제 얼마 안있으면 떠난다 싶으니까, 거이 매일같이 꿈속에서 비행기를 타는데, 뭔가 나도 기억이 안나는 일이 생겨,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도 못하고 잠에서 깨어버려, 비행기 타고 떠나는 꿈은 꿔보지 못했다.

이렇게해서 6313일에 서울을 떠나, 석달남짓한 일정으로 요꼬하마 남쪽의 도쓰까라는곳에 있는 히다찌 도쓰까 TV공장에 가서 TV생산 훈련을 받았다. 그때가 Color film 나온지 얼마 안되어, 값이 무척 비쌌는데, 신기한것은 많고, Color사진을 어찌나 많이 찍었든지 출장비로 한달에 일화 몇만원씩 받아 반은 사진값으로 날라가 버렸다. 또한가지 일화는, 돌아올때에, 친구가 여자 삼각 팬티가 어찌나 이뻐 보였든지 (한국에는 아직 삼각 팬티가 없었지 아마?) 이것을 마누라 준다고 대여섯개 샀는데, 서울의 세관검사에서 내놓을게 창피해서 모조리 겹쳐 입고 왔다가, 우연히 이를 실토하여 배꼽이 빠지게 웃은일이 있었다.

이렇게 일본을 다녀온 후에, 얼마 안있어 12만불어치 TV 생산용 기계가 히다찌에서 들어 왔는데, 공식적으로는 적산전력계 생산용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기계이름을 전부 바꿔서 세관에 신고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으면서, 별의 아이디어를 다내어 기계명을 바꿔서 세관에 신고 하였었다. 어쨋든 이기계들은 금성사가 처음으로 갖어보는 측정기들로, 한동안 이것들을 갖이고 노느라고(?) 재미있었는데, 갑자기 나라에 외화가 없어 부품을 사올수가 없다고, TV생산은 무기연기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5명은 모두 라디오생산으로 복귀했는데, 나만은 TV담당으로 남아서 기계도 관리하고, 프로젝트일도 보란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기계를 설치하고, 기계사용법도 익히고 했는데, 한달도 안가서 할일이 없어젔다. 한동안은 쉴드룸이라고, 밖에서 전파가 못들어오게 금속으로 온방을 씨워서 창도 없이 만들어진 측정용 방이 있었는데 (이것도 수입한 설비의 하나였다), 거기 들어가 닫아놓고 낮잠도 잤지만 (창도 없어 안키면 깜감해서 낮잠자기 최고였다) , 낮잠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도 안가서 잠도 안왔다. 그러다보니 아침에 출근할때가 되면 오늘 회사에 가서 뭣을 하고 하루를 보내느냐? 심각한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때에 철저히 실감한것이, 회사에서 너무 바쁜것도 문제겠지만, 월급받고 일안하고 노는것이 얼마나 힘드냐? 하는것이었다.내딴에는 한시간은 보낸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10 15분밖에 안갔으니, 하루 9시간이 90시간은 되는것 같이 느껴젔다.

결국 무언가 소일거리를 찾아야겠다고 머리를 짜낸것이 생산하고 있는 라디오의 전모델의 특성검사였다. 지금까지는 숙련공의 귀로 모든것을 판단했는데, 이제 측정기가 생겼으니, 이측정기들로 측정하여 모든 특성을 수치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창고에 있는 라디오를 모델별로 대여섯대식 갖어다가, 감도 (먼방송이 얼마나 들리느냐?), 선택도 (혼신을 얼마나 막아 내느냐?), 음질등을 모두 측정하여 수치로 기록하였는데, 사실은 이것은 모든 전자제품을 만들면 기본적으로 측정하여, 제품설명서에정격" “규격" 또는특성"이라는 이름으로 표시하여 출하하는것이 원칙인데, 금성사가 워낙 원시적 작업을 하다보니, 그리고 한국에서는 고객이 그런것에 신경쓸줄 아는 사람도 없든 때여서, 전혀 못해왔든것을 내가 처음으로 시행한것이었고, 금성사 근대화의 첫출발이 된것이었다.

이러는 도중에 한번은 창고에서 갖어온 라디오의 뒷뚜껑을 열었드니, 속의 철판이 뻘겋게 녹이 쓸어있지 않은가? 아마 만든지 오래됬든 모양인데, 이런것을 어떻게 팔을수 있겠나 싶어 그것을 들고 공장장에게 가서 보여주었드니, 공장장하시는 말씀이. 우리나라에서 라디오 만드는데가 우리뿐인데, 그런거라고 고객이 안사겠느냐? 그대로 팔으라고해"하는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그것이 그때의 금성사였다.

몇달을 이것을 하다 보니, 이일도 끝나서 할일이 없어젔다. 결국 TV생산은 해보지도 못하고 금성사에서 나왔으니까 2년은 착실히 지연됬든것 같다. 그래서 두번째로 아이디어를 낸것이 도면 정리였다. 그때는 청사진이라 하여, 암모니아를 써서 파란 도면을 구어냈는데, 문제는 크기가 도면마다 달르고. 어떤것은 손바닥만 한것도 있고, 어떤것은 신문지 두세배씩 되는것도 있고 형형색색으로 같은것이 없었다.누구도 관리도 안해서, 도면번호라는것도 없었고, 한번 설계실에서 도면을 그려서 설계를 생산으로 넘겨준 후에는, 생산에서 문제가 있을때 마다, 구두지시로 규격을 바꿨기 때문에, 실물과 도면이 일치되는것이 없었고, 금형의 마모로 서서히 모르는 사이에 크기가 변한것도 있어, 이래저래 도면과 실물은 완전히 따로 놀았고, 이것이 그당시 금성사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히다찌에 가보니, 모든 도면이 대여섯가지 크기로 규격화 되어 있었고, 도면번호에 의하여 관리되어 있는것을 보고왔다. 그때가, 미국은 Xerox 먼저 시작했겠지만, 일본에서리코"라는 회사가 처음으로리카피 (Recopy)”라하여 처음으로 Copy Machine 출시한지 얼마 안되었었고, 이것을 한국의신도리코"라는 무역회사에서 수입하여 팔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공장장을 애써서 설득하여, 리카피 한대를 사고, 제도사 두명을 배치 받아, 사내에있는 라디오 부품을 모조리 줏어 모아다가, 내가 마이크로 미터와 켈리퍼라고 1mm 100분지일까지 잴수있는 자로 재어서 도면을 새로 그리고, 실물과 도면이 틀린것은 설계자와 상의도하고, 내혼자 판단도 하면서, 금성사내의 도면을 100% 전부 새로그려서, 요새는 상식이 되어버린 A1-A5까지의 규격도면으로 재작성하였고, 도면번호도 부여하여, 금성사 도면이 비로소 도면같이 되어나갔다. 그러면서, 설계실에서 이유가 있어 고친 치수는 도면을 고치고, 자연 마모로 변한것은 금형을 전부 수정하게하고…. 이래서 도면과 실물이 일치하게 만들어 놨는데, 이짓을 한것이 거의 1. 퇴직할때 까지 이것이 내일었고, 후일 금성사에서 일한 후배들이 한결같이, “옛도면에 전부 [조동인]이라는 도장이 찍혀있어, 누군가 했는데, 선배님이십니까? 금성사의 기초는 선배님이 만드셨군요.”하며 칭찬을 많이하여, 그래도 내가 금성사에서 무언가는 했구나하는 자부심이 생겼었다.

이렇게 근무를 하는건지 노는건지도 모르게 일하며 거이 일년을 지났는데 (아무래도 두사람의 제도사 속도가 내가하는 일보다는 시간이 걸려 나는 비교적 한가한 일이었다.), 그때의 한국에서는 생활이 너무 어렵다보니까, (인건비가 지금의 인도보다도 싸지 않았을까?… 시간당 몇쎈트정도?) 어느회사에서나 퇴근시간에는 경비실에서 퇴근하는 여공들의 소지품뿐 아니라 몸수색을 하는 회사가 많았고, 금성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경비실에서 우리 사원들도 소지품을 모두 내놓고 도시락통을 열어 보이라고 했고, 이것이 모든 대졸 주임들을 격분시켰다. 수 많은 여공은 몰라도, 몇안되는 대졸 주임을 믿게다면, 누구를 믿고 회사를 운영하겠다는거냐? 그래서 그날로 대졸주임들이 동래의 온천장 식당에 모여 즉흥적인 성토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모두 자기네의 위신을 손상시킨 경영진을 열을 내어 성토했고, 일부에서는 즉각적으로 전원 사직하자는 극단론 까지 갔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큰일이 아니라할지 모르지만, 자부심이 상한 그때의 주임들로서는 묵과할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두세시간의 격론끝에, 결국 무언의 스트라이크로 결론이 나서, 일주일간 일안하기가 결정이 났다.

그래서 다음날 부터, 회사에 대하여는 아무말도 없이, 우리 설계실에서는 줄하나 긋고 지우고 한참 놀고, 줄하나 긋고 지우고 한참놀고…. 아러면서 일주일을 일 하나 안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을 이러고 지날려리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워낙 성격이 괄괄해 참을성이 없는 나는애라 모르겠다" 사표내고 금성사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와버렸다. 나를 입사시켜준 박승찬상무에게는 정말로 죄송스러웠지만

이상이 나의 금성사 3년반의 근무기록인데, 끝으로 한가지 일화를 추가하겠다.

한번은 일본 히다찌에서 손님이 와서 동래에 가서 저녁 대접을 한일이 있었는데, 구정회 사장이 참석했다. 우리 히다찌를 다녀온 6명이 모두 참석했는데, 이런데에 가면 술을 못먹는 나는 언제나 구석에 안보이는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한참 술잔이 왔다가다 하드니, 구사장이 어떻게 나를 봤는지 조주임 그구석에서 술도 안먹고 뭐하요? 술도 못먹으면 기술도 믿겠는데…… 고만 사표내소" 하지않는가? 농담인것은 빤하지만 술과 기술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술상을 뒤집어 업고 싶었지만, 박승찬 상무 생각이 나서 열심히 참았다. 여기서 배운것이, 아무리 농담인것이 뻔하지만, 임명권자가 부하에게 사표내라는 소리만은 절대하지 말아야하고, 본인의 Profession 깎아내리는 소리도 절대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성사에서 배운것들은,

사람을 한가하게 만들지 말라. 회사에서 일시적으로라도 할일이 없을 때는 집으로 돌려보내라. 너무 바쁜것도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어 능률이 안나게 하지만, 너무 한가해도 잡념만 생기고 회사에 대한 불만만 커진다.

부하를 믿어라. 도난문제 뿐이 아니라, 능력면에서도, 경험이나 지식이 아직 자기만은 못해서 믿어울지 모르지만, 자기가 그나이 때쯤에는 그만도 했을런지도 모른다. 부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상사에대한 절대적인 존경으로 돌아온다. 그뿐아니라, 모든것을 자기손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많은데, 결국 자기만 바빠지고 부하를 육성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