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대와 아마추어무선

 

나의 서울공대 생활은 입학부터가 실수로 들어갔지만, 다니는 동안에도, 사건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고, 한일도 많았고 정말 파란만장한 대학생활이었다.

서울공대는 시계를 잘못본 실수로 들어갔는데, 전기공학과에 들어가 놓으니까 통신공학과 생각이 자꾸 나서, 일학년 입학하면서 부터 어떻게하면 통신공학으로 돌아볼까하는 궁리만 자꾸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생각해 낸것이 유학이었다. 그때 한참 미국유학 바람이 불어, 전기과 한반 친구들도 미국유학을 많이 갔었기 때문에 더 자극을 받은것 같은데, 막상 유학을 갈려니까 원래가 괴팍한 성격에 남들이 다가는 미국은 가기 싫고, 그보다는 독일이 더 내 마음을 끌었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과학은 미국보다 독일이 더 앞서있는것으로 알려저 있었고, 근면하고 근검한 독일인들의 국민성도 마음에 들었고, 이래서 독일유학을 생각하였지만, 문제는 미국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도 많이 다닌다는데, 패전한지 얼마 안되어 고생이 심했든 독일에서는 아르바이트도 안된다고하고, 미국 같이 스칼라쉽을 받아 공으로 공부하는것도 독일에서는 기대할수 없다고하고, 그렇다고 우리집 사정이 내 유학비용을 감당할 정도는 안될것 같았고….

이래서 우선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독일에 펜팔을 만들어 독일어 공부도 겸해서 영어 독일어를 섞어가며 편지왕래를 하기 시작했었다. 여러달을 이렇게 사귀다 보니까, 그중에 독일 남서부의 Stuttgart근처에 사는 방직공장 공장장과 친해젔고, 그에게 내가 독일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드니, 자기집에서 숙식은 제공하겠는데 학비 까지는 대줄수 없다는 반가운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 내는 학비정도야 서울공대에 드는 비용으로 감당할수도 있을것 같아서, 목표를 Stuttgart공과대학으로 정하고, 입학원서를 제출하여 입학허가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부설로 있든 FLI (Foreign Language Institute) 에 다니면서 독일어 회화공부를 약 3개월 정도 하여, 그때는 그래도 독일에 가서도 아쉬운 소리는 할정도로, 독일인 선생과 독일어 회화를 할수 있을 정도까지는 갔었다.

그런데 독일학교에 원서도 내고, 여러가지 문서는 만들어야겠는데, 옛날 청산에서도 있었든 아버님이 미국에서 쓰시든 타이프라이터가, 625를 거치는 동안에 어디론가 없어저 버렸었고, 외사촌 누이네가 명륜동에 살아서, 그집에 구식 타이프라이터가 한대 있어, 만날 그집에가서 타이프라이터를 썼었다. 내가 타이프라이터를 치기시작한것이 이때부터인데, 그것이 오늘 콤퓨터 쓰는데에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것으로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아니면 내가 엄청난 선견지명이 있었나?)

이렇게 되니까 어짜피 끝까지 다니지도 않을 서울공대의 학교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고, 동익이도 미국유학 간다고 만날 둘이서 만나 유학준비 하느라고, 일학년 2학기부터는 적당 적당히 시험을 위한 공부정도로 넘기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동익이와 둘이서 함께 문교부 유학시험도 치르고, 이제 막 여권신청을 할 단계가 됬는데, 이 변덕꾸러기 대한민국 정부가 갑자기 재수 없게도 하필 고때에 병역을 필하지 않은 사람은 여권을 안내주겠다는 방침을 정하여, 유학계획이 암벽에 부디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당시 쟁쟁한 세력가였든 조병옥씨 아들, 신익희씨 아들들이 모두 자원입대로 군대에 들어갔는데, 우리같이 힘 없는집 자식이 어쩔것이냐? 동익이와 나도 이래서 학업을 중단하고 둘이 함께 대한민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논산훈련소로 간것이 대학 2학년 1학기가 끝난 1955 8월이었다.

이래서 논산훈련소에 입소를하여, 배치가 될때 까지 처음 몇일은 대기연대라는데서 지났는데, 밤이면 불침번을 교대로 서야한단다. 수십명이 일개소대가 되어 막사하나에서 양쪽에 반씩 나란히 자면서, 한시간씩 불침번을 서면 8명이면 족할텐데, 새벽 두시도 되기전에 벌써 한바퀴 돌았으니 불침번을 서라고 깨운다. 도대체가 어떻게된 계산인지 미적분으로도 풀수없는 희안한 계산이었다. 그러다 어떤친구가 하루밤에 두번이나 서라니까 화도 나고 빼짱으로 불침번 서는것을 포기하고 자뻐려서, 불침번이 그날밤의 반도 지나기 전에 중단되어 버렸고, 이것이 순찰하든 하사관에게 들통이 나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무사히 넘어갈 이가 없었다. "전원 기상"의 비상이 걸리고, 전소대원이 침대에 없드려 빠따방망이로 한대식 엉덩이를 얻어맞었다. 그리고 이것이 논산훈련소의 첫 경험이었다. (다행히 다시는 걸리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2-3일을 대기연대에서 이렇게 하는일 없이 대기하다가, 28연대에 배치가되어 28연대로 갔는데, 연대장이 (소령인가 중령이었든것 같다.) 밥그릇을 들고 나와서 보여주면서, 이것이 훈련소가 주는 밥의 양이니까, 이보다 밥의 양이 적으면 자기를 찾아오란다. 하도 훈련병용 쌀을 떼먹는 장교들이 많아, 식사량을 적게 주어 훈련병이 배를 곯기 때문에 28연대에서는 그렇지 않다는것이었다. 그덕택에 우리 연대에서는 식사량이 적어서 배가 고파본 일은 없지만, 다른 연대에서는 더러 있었든것 같다.

어쨋든 28연대 연대장은 아주 사람이 좋아서, 훈련생을 많이 보호해 주었고, 더구나 이때 함께 입소한 친구들이 대부분 유학가려든 대학생들로, 똑똑도 하거니와, 국회의원 아들에 정부고관 아들에 쟁쟁한 집안 아들들이 많아, 훈련소에서도 각별히 조심할수 밖에 없었든것 같고, 이래서 우리는 그래도 비교적 덜 고생을한것 같다. 하루는 저녁에 연대장이 연대내를 순찰하다가 하사관 한명이 매점(PX라고 했다)의 식탁위에서 자는것을 발견했었다. 당장 연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저, 그하사관을 빨가 벗기고 물이 잔득 고인 방공호에 처넣어 한시간을 기합을 주는것을 보았다. 연대장 말이, 하루종일 힘드는 훈련받고 지처있는 훈련병들이 쉴곳은 이곳 뿐인데,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자빠저 자느냐?는 질타였다. 이런 연대장 덕택에 우리는 덕 많이 봤었다.

사람이 지치면 걸어 가면서 잔다고 해서 거짓말 과장인줄 알았는데, 정말 피로가 심하니까 그것이 됐었다. 둘이서 어깨를 기대고, 행진을 하면서 깜박 깜박 잠자는짓도 실재로 해보았다. 그런데로 사람좋은 연대장을 만나, 교육장의 교육담당 교관들도 28연대를 특별취급 해주었었는데, 큰일이 한번 있었다. 8주의 전반기 교육이 거의 끝날무렵이 되든 어느날 저녁에, 술에 만취가된 연대 하사관이 우리소대에 와서 변소청소를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상대 운영위원장을하다 입대한 기골이 장대한 소대 향도(훈련병중에서 선발된 소대장격 대표)가 변소청소는 우리소대 차례가 아니라며 시비를 하다가, 술취한 상사의 명령은 받아드릴수 없다고 정면으로 대들어 대판 싸움이 붙었고, 급기야는 야간당직을하든 중위가 잠자다 깨어서 나타나서 중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중위도 얘기를 들어보니, 술취한 하사관이 잘못한것이 분명하니까 우리에게는 자라고 한마디하고 하사관을 데리고 나가서 그날밤은 그대로 가라앉는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이튼날의 포복교장이었다. 당직중위가 교관에게 무어라고 귀띰을 한듯, 그동안 적당 적당히 넘어가든 교육이 원리 원칙대로 시행되는데는 모두들 파김치가 됬지만, 기합을 준것도 아니고, 원칙대로 한것 뿐이니까 항의를 할수도 없었다. 수십메터 언덕을 올라가는 포폭 훈련을 하는데, 교관은 옆에 누어서 훈련병의 배가 땅에서 조금만 떨어저도 "다시"란다. 포복은 배를 땅에 붙여야하는데, 배가 떨어졌으니 할말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몇십메타를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이짓을 몇번하니 기진맥진하여 일어서기도 힘들었었다. 결국 잘못은 하사관에게 있었으니, 훈련병을 나무랠수는 없고, 그렇다고 하사관에 대든 훈련병을 그대로 둘수도 없고, 당직장교가 생각해낸 합법적인 기합에 걸려든것이었다. 이래서 그날 하루는 훈련소 생활중 가장 힘드는 하루가 되었고, 아무리 똑똑한 대학생들이었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모두 파김치가되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서 그래도 전반기 교육을 마쳤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배탈이 한번 크게 난 이후로는 계속 소화가 잘안되어, 밥그릇중에서도 제일 작은것만 골라 먹었고, 그때 까지는 아직 담배를 안피웠기 때문에, 매일 한갑식 주는 화랑담배를 건빵과 바꿔서 먹었었다. 그런데 이건빵이라는것이 희안해서, 한봉지를 다먹고 물을 실컷 마시면 영낙없이 설사가 난다. 그래서 어려운 훈련이 있는 날에는 가끔 건빵을 먹고 꽤병을 부려 빠지는 지혜도 터득하였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궁 즉 통"이라고 했든가? 그러다가 이번에는 건빵을 다시 한봉지를 한자리에서 다 먹고 물을 전혀 안마시면, 신기하게도 설사가 멎어 원상으로 돌아왔다.

훈련소에서 역시 가장 즐거운 날은 면회날로, 아버님 어머님도 몇번 다녀가셨고, 큰누나 딸인 명희도 한두번 다녀갔었다. 일요일인 이날은 면회장에가서, 가족과함께 맛있는 음식을 싫것 먹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이외에도 훈련소 에피소드는 한없이 많고, 그당시는 하루 하루가 지겨워 훈련이 끝나는날을 달력에 표시하고 하루 하루 X자를 그어가며 세어 나갔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첫째로 젊은 사람의 인내심을 많이 키워 주기 때문에 젊을 때에 한번쯤은 다녀오는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 10월달에 전반기 교육이 끝나면서 육군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논산훈련소 육군병원, 대전의 유성에있는 유성육군병원, 결핵환자만 모인 온양육군병원을 거처, 서너달 만에 의병제대로 이등병 제대를 하였는데, 그때 함께 입소한 유학지망 대학생들중 과연 몇명이나 제대로 군복무를 마쳤는지? 모르겠다. 아마 거이 없었지 않을까? 세상이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일직 제대할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도 않았을테고

한가지 에피소드를 더 소개하면, 한번은 육군병원에서 휴가증을 만들어 서울에 와서 남대문을 지나는데 여군장교가 옆을 지나갔다. 여군장교에게 경례하는것이 아니꼬와 그냥 딴전 보고 지나가다가 이 여군장교에게 붙들렸다. 이등병이 아무리 여군이지만 장교에게 경례를 안했으니 할말이 없었다. 거기서 한참 훈시를 듣고 돌아왔는데, 병원에 돌아오니 인사장교가 불러서 갔었다. 인사장교가 "너 임마 이등병이 왜 건방지게 장교에게 경례를 안했어?"하고 호령을 하면서, 내인사기록 카드를 보드니, "너 이놈 청고출신야? 내고향도 청주야. !!" 하지 않겠나? 결국 그 강한 지방색 덕분에 더이상 기합도 처벌도 안 받고 무사히 넘어 갔었다. 어떤 쫄병이 나같은 경우를 당하니까, 여군장교 모자를 벗겨 지나가는 거지 머리에 씨우고 경례를 했다는 웃으게 소리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근복무는 어떻게든 마치고 다시 여권수속을 하려는데, 독일의 펜팔에게서 편지가 왔다. 자기가 병에 걸려 회사도 고만두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너를 데려다 숙식을 제공할수가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지, 그렇게 애쓰고 고생하면서 군복무까지 했는데그러나 어쩔것이냐? 일장춘몽으로 돌릴수 밖에…. 이래서 꿈꾸든 독일유학은 무산되었고, 3월에 새학년도가 시작되면서 서울공대 2학년에 다시 복학하여 1년후배들과 한반에서 서울공대를 다시 다니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다 보니 이 억세게 운좋은 나에게도 이렇게 운나쁜일이 있었는데, 과연 독일유학을 갔든것이 더 좋았었는지, 지금 그대로가 오히려 좋았었는지 확실한 자신이 없으니, 오히려 운이 좋았었다고 처두자.)

이렇게하여 독일유학은 완전히 포기하고 서울공대 2학년에 복학을 해서, 이것도 내운명이니 할수없다고 서울공대나마 제대로 졸업하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열심히 공부할 생각으로 다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전기공학과 공부보다는 전자공학과에 (그때는 통신공학과가 전자공학과로 이름이 바뀌었었다) 관심이 자꾸 쏠리고, 애라 모르겠다고 필수과목은 할수없으니까 전부 전기공학과 과목에 수강신청을 하고, 선택과목은 모조리 전자공학과 과목을 선택하여, 결국 양다리 걸치고 나머지 2년반을 다녔다. (입대전에 한학기를 했기 때문에 학점 따놓은것이 있어, 2년반에 끝내고 9월 졸업으로 졸업할수 있었다.) 이래서 나는 서울공대 동창이 많다. 입학 동창에, 복학 동창에, 그것도 전기과 동창에, 전자과 동창에, 졸업이 9월이다보니까 졸업동창에어느것이 진짜 동창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삼성전자 같이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부장될 때 까지 적어도 대여섯 부서는 뱅뱅이를 돌려, 전문가는 하나도 안만들고 선무당만 만드는 회사의 관점으로 보면다재다능" 학생이 되었고, 미국회사 같이 평생을 한분야에서만 근무해서 전문가가 되어야하는 회사의 관점으로는무재무능" 학사가 되고 말았다. 이래서 금성사 설계실에 들어가 처음으로 라디오 설계를 하면서는 배운게 너무 모자라 골탕도 먹었고, 쎄미코어나 KMI등에서 경영을 하면서는 아는것도 많은 사원이 되기도 하였었다.

어쨋든 이러다보니 학교에 남아 연구생활 한다는 어릴적 부터의 꿈은 완전히 포기할수 밖에 없었고, 2학년 일년동안 전과신청을 내느냐 마느냐?에서 시작되어 인생을 왜 사느냐?로 발전한 고민의 시대를 일년을 보내기도했다. 결국 일년에 걸친 고민 끝에 “ENJOY TODAY”의 인생관으로 낙착된것도 이때이나, 이 얘기는 이미 썼으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외의 학교공부야 누구나 그런거니까, 공부시간에 있었든 일이야 쓸것도 없고, 학교시간 외의것이 화재꺼리가 아닐까 한다.

서울공대는 입학시험은 용두동에 있는 사범대학 교사에서 치렀지만, 통학은 태능에 있는 육사 근처의 신공덕동으로 통학을 했었다. 이제는 공덕동이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시골도 한참 시골로, 주위에는 배 밭이 많았고, 돈암동에서 학교까지 갈려면, 전차나 뻐스타고 종로4가 까지 가서, 거기서 동대문까지 걸어가서 청량리 가는 전차나 뻐스를 타고, 거기서 다시 태능/신공덕을 가는 뻐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야했다. 이렇게 돌아 가려니 시간도 많이 걸려, 역시 한시간넘게, 아마 한시간 반은 실히 걸렸든것 같다.

이래서 복학한 뒤에 약 반년은 집에서 다녔지만, 반년정도 후에는 서울공대 바로 앞의 조그만 토담집 한칸방을 세내어, 잠은 거기서 자고 식사는 학교식당에서 세끼를 얻어먹는 생활을 했었다. (이런 친구들이 10여명이되어 학교식당과 계약을 하고 한달에 얼마씩 내고 세끼를 모두 얻어 먹었다.) 그런데 학교 식당에서 그당시는 동까스가 가장 고급 메뉴로 인기가 좋았고, 이것을 가장 많이 만들다 보니까 남는것도 이것이 제일 많이 남아서, 아침은 따로 국밥을 만들어 줬지만, 점심 저녁 두끼를 돈까스만 먹여주는 날이 많았다. 나는 원래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이것도 전혀 문제가 안되어, 거이 2년을 매일은 아니지만 거이 매일 같이 돈까쓰를 먹고도 꺼떡 없었고, 여간해서 물리는 일도 없는 식성이라, 아직도 돈까쓰를 잘 먹지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은 고생깨나 했을것 같다.

대학생활 4년반에 큰일을 나열하라면, 역시 독일유학 시도, 군 입대, 인생관 확립 그리고 웅구엄마와의 데이트와 아마추어무선에의 열중 등이라 하겠다. 이중 처음 세가지는 이미 소개하였고, 나머지 두가지에 대한 얘기가 나와야 할것 같다.

청주고등학교 시절 얘기에서 임구혁이를 만나게된 얘기도 했고, 그집에 들랑거리면서도 여동생은 눈에 뜨이지도 않았었다고 했는데, 대학을 들어가서 서울의대에 입학하여 북아현동 1-260에 산다는 임구혁이네 집을 찾으러 몇시간을 북아현동을 헤멨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울에서 수백채나되는 돈암동 산1번지 집도 주소만으로 찾았고, 엉망진창의 판자집촌이었든 동부이촌동 집도 주소만으로 찾았는데, 주소만 갖이고는 끝끝네 못찾고 만것이 북아현동 1-260이었다. 지나가는 우편 배달부를 만나 물어봤지만 그도 모르겠단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편지를 보내어 어디선가 만나자고 해서 겨우 다시만나서 그집에를 갔었는데, 그근처를 수없이 헤메고도 못찾았었다.

각설하고, 이래서 그후부터 다시 구혁이네 집을 자주 들랑거리게 되었고, 군대 갔다 돌아와서 복학을 한 후에야 이화여고에 다니는 여동생이 눈에 뜨이기 시작하였었다. 그때에 나와 구혁이가 함께있는 방에 과일도 갖이고 들어오고, 때로는 함께앉아 오빠친구와 얘기도하고…. 이래서 자연스럽게 서로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처음으로 데이트라면 데이트고 아니라면 아닐수도 있는, 인천 작약도에 함께 놀러간것이 195791일이니까 (사진 뒷장에 우연히 날자가 써있어 아는거지 또 기억력 좋다는 소리 들을라.)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고, 임정혁양이 이화여고 3학년 때였다. 이날 구혁이 남매와 동현누나와 나와 넷이서 작약도에가서 하루를 놀다왔는데, 이것이 우리가 데이트라면 데이트랄수있는것을 시작한 Start였다고 보아야 할것 같다.

그후에도 한동안은 함께 놀러간 일이 없었고, 임정혁양이 이화여고 졸업하든날 졸업식에 함께 참석하여 사진을 찍어 줬고, 이대에 입학하든 날 입학식에 가서도 사진을 찍어 주는 정도였었다. 그러다가 정말 제대로 데이트를 시작한것은 이대에 입한한 후인 1958년 여름에, 덕수궁에서 독일의 교향악단이 와서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쓰를 연주한일이 있었는데, 내가 여기에 함께가자고 끌어내어 둘이서만 함께 갔든것이 처음이었다. 이때에 순순히 가자는데로 따라나왔고, 집안에서도 반대하는 기색이 없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용기가 나서 일요일에 자주 함께 놀러 다녔고, 무대는 주로 극장아니면 다방, 빵집정도로, 그때는 더이상 갈곳이 없었고 (그때 우리나이에서는 모두가 그랬겠지만.), 기껏 멀리가면 서울공대 근처의 배 밭에도 자주 갔었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서히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가까워저서, 누가 먼저 관심이 생겼는지? 누가 더 열성이었든지? 그것도 모르겠다. 너무 싱거운 얘기가 되어서 실망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다보니 자연히 양쪽 집안에서도 우리의 데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장모께서는 딸이 아직 대학교 1-2학년이고 졸업할 날아 멀었는데, 남자 마음이란 모르느건데 조심해야한다고 누차 말씀 하셨다고하고, 장인어른께서는 나만 가면 딸을 어디 먼곳으로 심부름을 자주 보내셨다는데, 구혁이는 내가 가면 곧잘 자리를 피해주기도 했다한다 (나는 못 느꼈는데....).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래도 양가가 모두 우리의 데이트를 공인하여 주어서 별 문제없이 스므스한 데이트를 약혼을한 1961 5월까지 3년을 계속하였었다.(이래서 내가 늘 코흘리기를 업어 길렀다고도 농담도 하고, 이화여대 4년을 입학할 때 부터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잘도 기다렸다고 생색도 낸다.)

내가 라디오라는것을 처음 만들어 본것은 중학교 1한년때였다. 청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 성북동에 살고 있었고, 성구의 어머니인 아주머니가 남산국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하루는 아주머니가 학교에서 교재로 받은거라며 광석라디오를 만드는 Kit를 한대분 갖어다 주신일이 있었다. 이것을 만들어 당시 서울에 하나 밖에 없었든 방송국인 KBS를 듣고는, 그것이 신기하여 라디오에 매혹이 되었고, 그후에는 여러번 라디오를 만들었다 부셨다하는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공과대학 통신공학과에 꼭 가겠다고 마음을 굳치게 되었었다.

이렇게 주로 라디오를 만들었다 부셨다하고, 집의 라디오가 고장이 나면 고쳐서도 쓰고 하다가, "아마추어무선"이라는것을 처음 알게된것이, 서울공대에 입학한지 얼마안되어 1954년 여름이었다. 당시의 한국의 전기통신계는 정말 황무지의 원시사회와 비슷하여, 공과대학 통신공학과를 졸업하고 갈곳이라고는 KBS방송국 아니면 체신부 전화국이 고작이었고, 이래서 아버님이 통신공학과를 가는것을 극구 반대하셨었다. 한편 사회자체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 끝나고, 반공이 국시가되어,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일반국민도 개인이 무전기를 갖고있다면 무조건 간첩으로 생각하는것은 물론이고. 단파방송만 청취해도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 신세를 저야하는, 극도의 "무선공포증"이 사회에 온통 깔려있든 시대였다. (이런 사상은 일제시대의 유산이기도 했고, 그것이 남북분단 상태에서 더 강화되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무선통신의 원시시대이다 보니, 무선통신이라는것에 관한 책도 "무선과학"이라고 해방후에 고등학교학생이든 조요한씨가 써서 발행한 책이 한권 있을 뿐이었고, 청계천 양쪽에서 미군 불하품인 무전기 부품들이 일부 거래되고 있어 통칭 "장사동 시장"이라고 불렸는데, 거기가 우리가 즐겨찾는 메카였다. 지금같은 "전자만능시대"에 이런 얘기를 하면, 수백년전 원시사회 얘기 같지만, 이것이 불과 50년전 한국의 현실이었다.

이러든 어는날 장사동 시장에서 "무선과 실험"이라는 일본의 월간잡지를 사왔는데, 그곳에 낮 설은 호출부호(Call Sign)들을 많이 보게되었다. JA1AA JA1BU HL1TA니 하는 호출부호들로, 내가 알고있든 방송국의 호출부호는 모두 네개의 영문자로 되어있어, KBS의 서울 방송국이 HLKA였고, 일본의 NHK JOAK, JOBK등이었는데, 이 색다른 호출부호는 가운데에 숫자가 한개씩 더들어가 있었다. 한국이 HL로 시작되어, HLKA(서울), HLKB(부산)등이 있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HL1TA라는 방송국이 있다 소리는 들어본일이 없었다. 한페이지 전부에 이런 호출부호가 많이 나와있는것으로 보아, 미스프린트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몇몇 호출부호 뒤에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는것이 있어 (방송국에 개인 이름이 써있는것도 이상했지만), 평소의 호기심이 또 발동하여, 생전 처음으로 국제우편이라는것을 보내 보았다. 일본의 JA1BU라는 호출부호에 나와있는 일본인 앞으로 "JA1BU JABU의 잘못은 아닌가? 가운데 숫자는 왜 들어가 있는가?"라고, 오래동안 안쓰든 일본어로 편지를 보낸것이 내가 아마추어무선을 알게된 계기가 되었었다.

편지를 보낸지 한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그런가보다고 거이 단념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엉뚱한 한국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JA1BU에게서 연락을 받았는데, 한번 만나보잔다. 누군지는 몰라도 같은 무선계에 있는 사람인것 같아 만나자고 답신을 하고, 서로가 초면이다보니 "몇날 몇시에 돈암동 XX빵집에서 만나자. 나는 이런 옷을 입고, 손에는 "무선과 실험"이라는 일본잡지를 갖이고 나가겠다." 라고 마치 간첩 접선하는 식으로 맞난 사람이 "정혜선"이라는 선배였다. 이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신 위인 분으로, 육군에서 통신중위로 있다가 제대한 분이었는데,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 일본의 JA1BU가 서울의 HL1TA를 전파로 만나 내얘기를 했고, HL1TA가 다시 정혜선씨에게 내얘기를 해서 자기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단다.

무선에 흥미는 많았으나, 고작 라디오나 만들었다 부셨다하든 나에게는 무선통신이라는것 자체가 생소했고, 더구나 개인이 자기집에 무선국을 차려놓고 외국과 교신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하든 세로운 환상의 세계였다. 이래서 나와 "아마추어무선 (Amateur Radio = Ham Radio)"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아마추어무선에 미친 생활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위에서 말한 HL1TA는 서울공데 전기공학과의 한반위였든 "강기동"이라는 학생이였기 때문에, 거이 매일 같이 학교에서 만나서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아마추어무선 얘기를 하며, 그에게서 아마추어무선에 대한것을 자세히 배울수 있었고, 그의 집에도 가서 그가 직접 일본의 햄들과 교신하는것을 본후에는 자나 깨나 생각나는것이 "아마추어무선"이었다.

이때에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는 강기동외에도 그의 경기고 동창들이 주동이되어 아마추어 지망생들이 10여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마추어무선이 무언지 아는사람은 이들과 그외 정혜선씨등 불과 몇명 뿐이었다. 물론 "무선공포증"이 극심하든 당시 상항하에서, 아마추어무선을 허가 받는다는것은 불가능한 얘기였고, 주무부서인 체신부 전파관리국 아저씨들은 아마추어무선이 뭔지? 그런 소리를 들어본일도 없는 시절이었다. 이런데도 강기동이가 집에서 HL1TA라는 호출부호로 아마추어무선국을 운영하고는 있었으나, 이것도 무허가 불법무선국이었고, 그의 부친이 내무부 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빽으로 당국이 눈 감아 줘서, 그런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다음해인 1955년초부터, 공대내에서만 아무리 떠들어 봤자 될일이 아니라고 외부로 발을 넓혀, 역시 경기고 동창들을 위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배명승이나, 당신 유일한 무선전문의 고등학교였든 동국무선 (지금의 광운전자) 학생들을 상대로 동호인들을 규합을하여, 내가 막 2학년이 되었든 1955420일에 겨우 50여명의 인원으로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KARL = Korean Amateur Radio League)을 결성하였고, 여기에 KBS의 기술직으로는 최고급 공무원이었든 이인관 기감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그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체신부에 아마추어무선을 개방해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었다.

그렇지만 회원이라야 주로 대학생 고등학생이고, 회원수도 백명도 채안되는 소규모 단체의 힘이 강할수도 없었고, 그당시의 사회적 형편에 체신부가 그렇게 쉽게 우리말을 들어줄 이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약 2년동안은, 한국에는 아마추어무선이라는 말을 들어본사람도 극소수였으므로, 아마추어무선의 홍보활동으로 "KARL"이라는 연맹기관지를 발행하여, 회원과 체신부 공무원들에게 뿌렸고,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학생들이 주축이었고, 거기에 정혜선씨와, HLKY 기독교방송국의 기술부장이든 이덕빈씨등 사회인사 몇명이 가세한 소위 KARL 창립위원들은, 종로2가 기독교방송국의 1층에 있었든 "시온다방"에 한달에 한번씩 모여, 체신부 성토도하고 대책도 논의하고... 어쨋든 우리가 할수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는 2년이었다.

요새 학생들은 주머니도 두둑하여, 핸드폰 없는사람이 없고, 데이트 자금도 넉넉한것 같지만, 그때의 대학생들 주머니에는 뻐스비 정도가 고작이었고, 시온다방에 가서도 커피값은 HLKY의 이덕빈씨가 매번 전액부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KARL 기관지를 인쇄할 돈이 있을이 없고, 요새사람들은 구경한일도 없겠지만 소위 등사판 인쇄를 했었다. 등사판이란 쇠를 깎는 줄같이 우툴두툴하게 되어있는 철판위에, 기름을 잔득 먹인 소위 원지라는것을 놓고, 끝이 쇠로되어 뾰족한 철필로 글씨를 쓰면, 그부분만 기름이 깎여 없어저서, 이렇게 글씨를 쓴 원지를 철망으로 되어있는 등사판위에 놓고, 잉크를 뭍인 롤러로 힘주어 굴리면, 글씨를 쓴 부분만 잉크가 침투하여 종이에 글씨가 인쇄되는, 완전히 수동식의 (우리는 Armstorong 방식이라고 불렀다.) 원시적 인쇄방법인데, 옛날에는 학교에서 시험지도 이렇게 많이 인쇄하여, 장수가 적은것은 등사판 인쇄가 많았었다.

이렇게 한장 한장 인쇄하여, 이것을 책모양으로 제본을하고, 그것을 다시 하나 하나 포장하고 주소를 일일히 써서, 우체국에 한아름 들고가서 한장 한장 우표를 붙여서 발송을 하려면, 팔도 떨어지게 아프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책을 낼때마다 서너명이 근로동원하여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사무실도 없다보니까, 글씨를 잘쓰든 정혜선씨가 원지에 글씨쓰는것을 도맡아 해서, 그집의 단칸방에서 공대생들이 근로봉사를 했으니까, 열성들은 대단하였고, 그러면서 "하고싶으니까 하지, 돈주고 하라면 못할 일"이라고 농담도 많이 했었다. 이것도 회원수가 적어 100권도 안만들었으니까 할수있었든 일이었는데, 이나마도 워낙들 가난한 때였다 보니까, 한달의 몇백원의 회비도 잘 안걷혀, 월급 받는 선배들의 주머니도 많이 털었지만, 그래도 자금이 모자라 건너 뛸수 밖에 없었든 달도 많았었다.

나도 KARL 탄생과 함께 창립위원으로 이런일에 많이 봉사하여, 원고도 쓰고 등사판도 밀고 우체국에도 가고 봉사를 많이 했지만, KARL을 결성하고 서너달 후에는 군에 입대하여 8월부터 반년이 조금 넘께는 참가를 못하다가,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는 또다시 이런일을 많이 했었다. 그러면서 외국의 아마추어들이 교신하는것을 듣기라도 해야겠는데, 집에서 학비 타쓰는것도 눈치껏 하든때에, 수신기를 살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다 한번은 동선이 누나가 양복한벌 해입으라고 자기 월급에서 몇만원을 준 일이 있었다. 그때는 대학생간에 군 작업복을 까만색으로 물들여 입느것이 유행이랄것 까지는 없지만 많아서, 나도 지금보면 대학시절 사진에 이 까만 작업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많다. 그렇지만 양복보다는 수신기가 급하여, 누나에게는 양복사겠다고 받은돈을 가지고, 그길로 장사동 시장에가서 미군 불하품인 BC-342라는 단파대 군용수신기를 사와서, 결국 대학4년반에 양복한번 못입어 봤고, 온 가족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었다.

이렇게 처음 2년정도는 KARL이 큰 진전 없이 체신부 아저씨들에게 가서 때도 쓰고, 비록 등사판이기는 하지만 KARL지를 통하여 국민계몽도하다가, 2년후인 1957년 봄부터는 그나마도 한반위였든 강기동이를 위시한 전기공학과 핵심 멤버들이 모두 공대를 졸업하게 되어, 강기동등 몇명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나머지는 한국전력에 취직되어 지방 발전소로 전부 내려가 버렸고, 정혜선씨도 직장을 얻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다보니까, KARL을 이끌어 나갈 초기멤버가 나밖에 남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래서 좋던 싫든 연맹일이 몽땅, 막 서울공대 3학년이된 나에게 넘어오고 말았고, 이때부터 총무이사라는 직함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KARL지의 편집/발행, 대정부 교섭, 회원 의견수렴등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는 시절이 시작되었었다. 

군에서 제대하여 복학한 2학년 때에도 아마추어무선연맹일을 열심히 도왔었지만, 그래도 강기동과 정혜선씨가 중추적인 일은 했었고, 나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활이었는데, 1957년에 3학년이 되면서 부터는 전부가 내일이 되어버려, 신공덕동의 하숙집에서 매일 같이 KARL지 원고를 쓴다고 시간을 많이 소모했고, 체신부 들랑거리고, 중앙청의 방송관리국의 기감으로 계시던 이인관 이사장에게 상의도하고 문서의 결제도 받으러 뻔질나게 들랑거렸다. 더구나 KARL 창립멤버였든 열성분자들이 한꺼번에 모두 없어지고 보니 KARL지 원고조차 제대로 쓸사람이 없어, 어떤 달은 일본의 아마추어무선 잡지를 이것 저것 번역하여, 이름을 바꿔가며 한달치 원고의 거이 전부를 혼자서 쓰다시피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학교공부를 제대로할 시간도 없었고, 강의를 종종 빼먹기도 하였고, 어짜피 학교에 남아 연구생활하는것은 포기한 마당에, 정 시간이 없으면 깨알같은 글씨로 컨닝 페이퍼를 만들어 학교시험을 때우기도하고, 이래서 학교공부는 적당 적당히 넘어가기도 잘 했지만, 그래도 C학점은 별로 받아 본일 없으니까 아무래도 요령이 좋았든것 같다. 더구나 4학년이 되어서부터는 임정혁양과의 데이트도 시작되어 이래 저래 바쁜 대학생활이었다.

매달 KARL지의 원고를 쓰기도 바쁜데, 그당시 한국의 전파법규는 일제시대의 전파법규를 그대로 번역하여 만들어 놓은것이라, “아마추어무선"이라는 문구도 없었고, 체신부 전파관리국 공무원들도 KARL 덕택에 아마추어무선이라는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니까, 새로운 전파법규를 만들어 아마추어무선에 대한 법을 만들수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래서 생전 법규라는것은 제대로 읽어 본일도 없는 내가, 미국, 일본, 영국등의 아마추어무선에 관한 법규들을 모두 줏어 모아 이것을 끙끙거리며 공부하여, 한국의 "아마추어무선 법규"를 초안하여 체신부에 갖다주어, 훗날 이것이 한국의 아마추어무선 법규로 고대로 제정되기도 하였고, 아마추어무선의 "호출부호 지정 원칙"도 내가 써준대로 그대로 실행하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체신부 공무원이 아마추어무선을 너무 몰라서, 오히려 내가 하자는데로 말을 잘 들어주어, 일이 쉬웠다고도 말할수 있었다.

연맹내의 일로는 이것도 미국, 일본, 영국등 여러나라의 아마추어무선 윤리강령을 모아서, 이것들을 참고로하여 "아마추어무선의 신조"라는 제목으로 KARL지에 싣기 시작하여, 이것이 오늘 까지도 그대로 "아마추어무선의 신조"로 확정되어 내려 오기도 했고, "세계아마추어무선연합 (Inter- national Amateur Radio Union)"에 가입신청을 내어, KARL IARU의 멤버로 정식 가입하여 국제무대의 일원이 된것도 이때였다. 참고로 이때 만들어 지금도 KARL지 첫페이지에 매달 그대로 실려 내려오고있는 한국의 "아마추어무선의 신조"는 다음과 같다.

아마추어는 전파의 공공성을 존중한다.
아마추어는 우호적이다.
아마추어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
아마추어는 항상 연구심을 간직한다.
아마추어는 전기의 위험을 잊지 않는다.

어쨌든 KARL이 탄생하고 처음 2년은 별 진전이 없었으나, 우리가 하도 아마추어무선국을 허가해 달라고 졸르고 다니니까, 체신부에서도 서서히 생각이 달라저, 개인에게 아마추어무선국을 허가하기에는 시기상조지만, 학교를 대상으로는 고려해 보겠다는 진일보된 말이 나오기 시작한것이 1957년초였고, 위에 말한것 처럼 이때에는 한국의 전파법규에 "아마추어무선"이라는 말은 없고, "실험무선국"이라는 규정이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전용하여 "실험무선국"이라는 명칭으로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여, 결국 1957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실험무선국 HL2AA"라는것이 탄생하기에 이르렀었다.

비록 아마추어무선국이라는 명칭은 아니었고, 개인 명의도 아닌 문리대 학장명의로 허가된 단체무선국이어서, 이것을 운용할수있는 사람도 문리대 학생으로 무선통신사 면허증을 갖인 사람만으로 제한되고, 운용을 하려면 학교내에 설치된 이 무선국에 가야만 할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합법적으로 아마추어무선의 전파를 낼수있다는것이 얼마나 반가웠든지? 2년이라면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그래도 이런일을 거이 무에서 시작하여 2년만에 이만한 성과를 올린것이 우리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것을 효시로 계속하여, 서울공대, 연세대, 한양공대, 이리공고, 동국무선고등학교, 공군사관학교등 각학교에 실험무선국이 개설되었고, 이래서 비록 제한적이고 변칙적이기는 했지만 합법적으로 한국의 아마추어무선 활동이 시작되었었다.

나의 서울공대 학생시절은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변화무쌍하게, 그리고 학교공부는 오히려 뒷전으로 지나갔고, 미국대학였드라면 졸업장도 제대로 못받았을런지 모르지만, 입학만 하면 졸업은 시켜주는 한국대학의 특성으로 1958 9월에 그래도 졸업장은 받을수있었고, 이래서 나는 대학을 앞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왔다고도 말하였고, 학교에서 배운것은 졸업장과 맞바꾸어 학교에 반납하고 나왔다고도 표현한다.

한편 나는 대학 4학년이 되고, 임정혁양은 이화여대에 입학하면서, 둘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는데, 만나면 만날 아마추어무선 얘기를 하니까, 정말 아마추어무선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나에게 잘 보일려는 미음으로 그랬는지? 아직도 잘모르겠지만, 자기도 아마추어무선을 하겠다고 나서서, 만날때마다 아마추어무선 강의를 해주었고, 반년이상을 교육하여 19594월에 둘이서 함께 아마추어무선사 자격시험을 보아, 체신부장관의 면허증을 받았고, 이래서 한국 최초의 여자무선사가 탄생하였었다. (아마추어 뿐 아니라, 프로무선사 포함하여 한국최초의 여자무선사였다. 자격시험이 끝난후, 체신부 시험관이 나를보고 "수고는 했는데 좀더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한것으로 보아, 최초의 여성 응시자라고 조금은 봐준것도 같았다.) 이래서 KBS-TV "나는 누구일까요?"라는 스무고개식 TV프로에도 나갔었고, 한국일보, 현대경제일보, Korea Herald등 일간신문에도 크게 소개되어, 일약 유명해지기도 했었다.

대학을 1958 9월에 졸업하고, 1960 9월에 금성사에 들어가 부산으로 갈때 까지 2년동안은 서울에 있으면서,“전파시보"라고 한국에서는 처음 발행된 무선통신관계의 주간신문 기자노릇도하다가 한달만에 고만두고, 두번째로 간것이 라디오 학원이었고, 거기서 반년쯤 야간학생 가르키다가,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초대이사장이었든 이인관씨가 기감으로 최고 보스였든 공보처 방송관리국에 기감의 주선으로 들어가, 일년 남짓하게 중앙청으로 출근하면서 공무원 생활을 했었는데. 이동안에도 KARL일은 계속 맡아서 했었다.

그러든 1958년 말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었다. 전세계 어디를가나 아마추어무선의 전파를 안내고는 못배기는 미군들이, 체신부에 어떤 압력을 넣었는지, HL9KA-HL9KZ까지의 호출부호를 활당받아 군보조무선국(MARS - Military Auxiliary Radio Station)이라는 명칭으로 아마추어무선국이 허가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한국전쟁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하여 수만명의 인명피해를 내가며 북한의 침략을 막아주었든 미군들인데, 체신부인들 어쩔수 없었겠지만, 이소식을 듣고 젊은 한국 아마추어들은 격분을 했고, "체신부가 한국의 체신부냐? 미국의 체신부냐?" "한국에서 아마추어를 할려면 미국 시민권부터 받아야하느냐?" "우리 모두 체신부에 사전통고를 하고, 불법으로 전파를내어 전파데모를하고, 전부 헌병대든 경찰서든 잡혀가자!!" 등등 별의 별 소리가 다 나왔었다. (어째 요새 한국에서 많이 듣는 소리 같지만...)

연맹도 즉시로 항의공문을 체신부에 제출하였고, 사태가 이렇게되자 체신부도 그대로 지나갈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어, 다음해인 1959년 봄에 그래도 아직 개인국은 힘들지만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앞으로 단체국을 허가하겠다는 통고를 해왔다. 그런데 막상 무선국을 설치하려니, 연맹이 송수신기를 마련할 제원도 없었고, 설치할 사무실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회원들중 여유가있는 친구가, 자기의 개인국이 허가되면 쓸려고 마련해 두었든 송수신기를, 임시로 대여하는 형식으로 빌려오고, 임일명 회원의 아버님이 당시 서울시장으로 자기집 문간방을 제공하여 주어, 억지로 무선국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체신부는 내가 써준 아마추어무선 전파법규를 국회를 통과시켜 정식 법으로 만들 시간 여유도 없으니까 (이런 법규는 국회가 거들떠 보지도 않을테니까), 체신부 내규로 임시로 제정하여, 드디어 정식으로 "아마추어무선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아마추어무선국 HL9TA"를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HL9TA의 첫전파가 나간날이 1959719일로, 이날이 한국에서 명실상부한 공식 아마추어무선이 시작된 날이 되었다. 이날 전파를 낸 사람중에는 나는 물론이고, 한국 최초의 여성무선사 임정혁양이 끼어 있었고, 처음 전파의 영예는 모두가 양보하여 임정혁양이 마이크를 잡았었다.

이것을 계기로 개인국허가에 대한 교섭도 진전을 보여, 1년후인 1960 6월에 결국은 체신부가 개인 아마추어무선국 허가신청을 접수하기 시작하였었다. KARL을 창립한지 무려 6. 멀고 험한 길이었지만, 가난한 대학생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시작한 KARL도 회원수가 전국적으로 근 300명으로 늘어났고, 맨주먹으로 시작한 KARL로서는 "무선공포증"이 심각했든 사회에서, 나중에 알게 됬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중앙정보부"의 반대였든것 같은데, 그래도 결국은 아마추어무선의 완전개방이 목전에 다다른것이었다. 이래서 너도나도 개인 아마추어무선국의 허가신청을 준비하여 일착으로 7명이 신청을 하였는데, 막상 그동안 그렇게 뼈빠지게 뛰든 나는 경제적 형편이 당장 송수신기를 마련할 길이 없었고, 이래서 일차접수에서는 누락되고 말았다. 그때에 신청만 할수 있었다면, 한국에서 제일 처음의 호출부호 HM1AA는 내것이되느것은 문제가 아니었었는데 (호출부호 배당도 내가 하자는데로 해줬었으니까), 결국 영예의 HM1AA호출부호는 남에게 돌아갔고, 나는 HM1AJ로 열번째 호출부호를 받았고, 임정혁양은 HM1AM으로 열세번째가 되고 말았다. 정말 아깝고 애석한 일이었다.

어쨋든 이래서 개인국 허가도 시작되어, KARL의 창립목표가 6년만에 완전 달성되었고, 나는 나대로 미아리 우리집에 HM1AJ를 차려놓았었고, 임정혁양은 내가 설치해준 HM1AM으로, 거이 매일같이 저녁때마다 전파로 교신을하며 데이트약속도 하다보니, 우리의 교신을 엿들은 아마추어 사이에는 우리의 데이트약속도 비밀이 아니게 되기도 했었다. 한편, 그후 계속 보아오든 KARL업무는 내가 금성사에 들어가 부산으로 가면서 일시 손을 뗏다가, 3년후에 다시 서울로와서 복귀할 때까지 내손을 떠났었지만, 그후에는 다시 일하기 시작하여 미국으로 이사 오든 1973년까지 거이 10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KARL일을 본것이 누계로 14년 정도는 되었었으며, 19655월에는 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유엔 산하 무선통신관련 국제기구)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아마추어무선에대한 공로로 체신부장관 감사장도 받았었다. 1965년에는 아마추어무선을 홍보하기위하여, 한국에서는 최초의 아마추어무선 관련 단행본인 "우정의 전파 - 아마추어무선"이라는 책을 발행하였고 (1973년 재판, 1991 3), 마지막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제3 KARL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이사장직도 지내다 미국으로 왔다. 이제 한국의 아마추어무선국수도 급격히 늘어나서, 지금은 약 25,000국이 허가가 되어, 세계에서 열번째내에 드는 아마추어 인구라니, 정말 격세지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