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미코어의 경험

부산의 금성사생활도 3년반만에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온것이 1964년초. 그로부터 한달후인 1964 4 29일에 웅구가 출생하였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후인 1964 5 29일에 아버님이 후두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후두암으로, 그때는 대구의 동산병원에 밖에 없든 방사선 치료를 받으려 매월 정기적으로 대구를 다녀오셨었는데, 여러해를 고생하시다가, 1964년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삼성에 근무하던 청고 동창 친구덕에, 지금의 KBS-2, 그때는 삼성 소유였든,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 라디오서울 송신소에 금방 취직이되어, 일년쯤 다녔는데, 전부터 안면이 있든 중앙상역이라는 무역회사사장이 자기네도 TV 생산하려고 RCA 기술계약을 맺었다며, 와서 공장을 세워 달라고 했다. 원래 내성격은 공장때기가 제일 맞는것 같아 승낙하고 조그만 공장을 세워놨는데, 알고보니 이친구가 정부의 특혜를 노리고 만들어낸 사기극이었다. 이래서 반년도 못가 들통이났고, 나는 석달이나 월급도 못받는 처지가 되었었다. 안되겠다고 못받은 월급 대신에 쌤플로 들여온 TV한대 반짝들고 회사를 나와버렸는데 갈곳이 없었다.(덕분에 한국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TV 갖인 집이 되었지만…)

이런 판인데, 박승찬씨가 그래도 형님의 처남이라고 금성사에서 내가한 짓은 불문에 붙이고, 훼어차일드라는 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거기 가서 일해보겠느냐고 물어오기에, 반갑다고 OK하고 힘좀 써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래서 훼어차일드에서 한국회사 (쎄미코어) 사장으로 나와있든 Mr. Clevenger와의 인터뷰가 성사되었고, 이것이 내가 미국회사를 근무하게 계기였다.

취직여부를 놓고 얘기하는 중요한 만남인데, 그때까지도 미국인과 이렇게 마주앉아 얘기해본일은 없었고, 외국인과의 영어회화는, 625 (나는 3) 부산에 피란가서 돈 번다고 부두노동를 할때에, 한참을 혼자서 입속으로 연습하고나서 미군 MP에게 “What time is it now?” 하니까 대답은 안하고 자기 팔둑시계를 불쑥 내밀고 보여주어. 알아듣기는 했구나.”하고 안심한것이 처음이고, 그후에는 대학다닐때 석달동안 서울 문리대 부설 FLI (Foreign Language Institute) 에서 독일어 회화 배운다고 독일인하고 몇마디 영어로 해본것, 그리고 아마추어무선한다고 전파로 외국인들과 교신 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정해진 영어를 해본것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영어회화는 거이 99% 아마추어무선으로 익힌 영어였다. 외국아마추어와 교신하려면 정해진 몇개의 문장을 새로 교신을 할때마다 반복하니까, “내이름은 조이고, 만나서 반갑고, 송신기는 뭐고, 수신기는 뭐고, 안테나는 뭐고, 날씨는 어떻고, 여기 위치는 어디고, 너의 신호강도는 어떻고….” 이소리를 하루에도 수십번 반복하니까, 몇개의 문장은 언제나 거침없이 줄줄 나오지만, 그이상 얘기가 나오면 이것 저것 핑계를 만들어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것이 갓난애가 배우는것 처럼, 가장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배우는 길이지만, 어쨌든 미국인과 제대로 대화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각설하고, 인터뷰를 하러갔드니 나를 시험할줄 알았는데 (한국회사는 인터뷰라고 본일 없고, 이력서 들이 밀면 그것만으로 입사가 결정되고, 혹시 면접을 해도 시험관이 질문을 하며 나를 테스트하는데), 우선 훼어차일드라는 회사설명을 한참 늘어 놓았고, 다음에는 한국의 사회얘기, 역사얘기, 지리얘기…., 이것은 면접시험이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같았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내능력을 관찰한것 같다.) 거이 두시간 남짓을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짧은 영어회화 실력이었지만, 회화에 대한 자신도 생겼는데, 알았다며 가서 기다리란다.

그래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일주일 후에 집으로 편지가 와서 (그때는 집에 전화도 없었으니까) 점심을 함께하자고 점심시간에 호텔식당으로 오란다. 지정된 시간에 갔드니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이얘기 저얘기 팔도강산 얘기를 두세시간 남짓하다가, 갑자기 월급을 얼마나 받았으면 좋겠느냐? 물어왔다. 한국에서 월급은 언재나 우선 입사해 놓고 월급 봉투 받아봐야 얼마인지 알았지, 이런 질문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질문을 하니 대답은 해야겠고금성사 월급이나 라디오서울 월급을 감안하여 50% 높혀서 얼마를 달라고 했드니, 자기네가 예상하고 있는 액수보다 많다며 깍잔다. 세상에 월급흥정은 처음인데, 대한남아의 위신이 있지, 딴것은 몰라도 내값을 깎을수야 있나? 한동안 버텨봤는데, 상대도 저의 사정이있으니까 쉽사리 OK 안했다. 아마 적어도 30분이상 싱갱이를 한것 같은데 도저히 안되겠기에 타협안을 내놓았다. “너나 나나 처음 만나, 너도 내능력을 모르고, 나도 너의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모른다. 우리 한번 6개월의 시용기간을 갖어 보자. 나는 능력의 가치가 내가 제안한 만큼은 충분히 되는것 같지만, 네가 나를 모르니 어쩌겠는냐? 우선 네가 원하는 월급으로 정하고, 6개월만 근무해 후에, 네가 내능력이 인정되면 그때 가서는 내가 요구하는 액수로 올려달라, 나도 6개월 일해 봐서 회사가 있을만하면 계속있고, 시원찮으면 고만두겠다.”

어디서 실직중인 내가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런 뱃장을 부릴수 있었는지? 서투른 영어로 이런 표현을 할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차지만, 어쨌든 Mr. Clevenger 제의를 받아드렸고, 네시간을 예기하고 일단 취직이 된것으로 결론을 내고 헤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천성적으로 미국인의 사고방식에 쉽게 물들수있는 소질이 있었나보다. 생전 처음의 월급흥정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아니면 아버님의 미국유학 다녀오신 경험이 나도 모르게 사고방식을 물들였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해서 사원번호 13번으로 (미국회사에서는 계급에 관계없이 무조건 채용순으로 사원번호를 준다) 채용된후 직책이 Training Supervisor (교육담당 사원)였다. 하는 일은 처음 입사하는 여공들을 주일간 교육시키는 일이었다. 아마 내가 말이 안막히고 계속 줄줄 떠드니가 직책이 제일 맞는다고 생각했나 싶다. 이래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그때 한국에는 교대근무라고는 생각도 못할 때로, 모든 회사가 (공장도) 9시에서 6시까지 (공장은 대개 8시에서 5) 낮근무 뿐이었는데, 쎄미코어는 처음부터 2교대를 시작하여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와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2교대로 회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12시부터 아침 4시까지의 네시간은 통행금지시간이 있었고, 아침4시에 통금이 해제되고, 6시까지 미아리에서 대방동을 가려면 뻐스도 없고, 그비싼 택시를 탈수밖에 없었는데, 두번째 만났을 때에 얘기를 했드니, 자기네 차로 출근은 시켜주겠다하여, 회사차가 한시간전쯤 5시경에 우리집에 데리러 왔었다.

회사가 대방동 공장의 작업을 개시하고 이런 근무를 서너주 했을까? 사원수도 수백명으로 늘어 났는데, 알고 보니 회사차를 대주는것은 처음 채용된 10명미만이고, 나머지 사원들은 출근에 굉장히 여려움을 격고 있는것을 알게 되었다 (여공들은 모두 공장근처에 기숙하지만 사원급이 문제였다.) 이래서 나하고 동갑이고, 당시 현장사원으로는 가장 나이가 많았든 이영일이와 (생산담당 현장 Supervisor였다) 내가 총대를 매고 사장실로 갔다. 지금 우리 후배들이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회사가 뻐스를 전세계약하여 출근만 도와줄수 없겠느냐고 제안을 했는데, (내기억에 한달에 그때 돈으로 만원정도? 회사로서 큰돈은 아니었다) 너의들은 처음부터 계약이 그러니까 차를 대주지만, 딴사원은 그런 계약 없으니까 안되겠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사원인데 도와줘야 하지않겠느냐고 통사정을 했지만, 계약을 내세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미국인 생활이 이런식이구나하고 문화의 차이를 정말 통감했다. 논리가 옳으면, 인정으로는 안통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대신 논리만 전개하여 설득하면, 한국인같이 위신 세우려 고집은 안부리고, 의외로 쉽게 동의해주는것도 그들이라는것도 이런 과정에서 배웠다.

쨌든 거의 한시간이나 얘기 해도 안되어 회담은 결열되었으나, 그대로 물러설수 없는것이 대한남아의 기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좋다. 논리는 네가 맞다. 그러나 한국에는 논리보다 앞서는 인정이라는것이 있는데 너의도 한국에서 한국인 데리고 비지니스를 하려면 인정을 무시해서는 힘들거다. 어쨌든 안되겠다니 우리 둘이 제일 나이든 년장자로서 책임지겠다. 우리둘이 뻐스값을 월급에서 갹출하여 전세뻐스로 후배들을 출근시키겠다" 한마디하고 둘이서 사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그자리에 미국인 보스였든 Mr. Silverstein 처음 부터 끝까지 참석하여서 한마디 안하고 듣고만 있었는데, 우리가 나오자 뒤따라 나오드니, 사장실 바로 밖에서 내등을 치면서 말 한마디 안하고 엄지 손가락을 주먹 위로 올려서 잘 했다는 표시를 하는것 같았다.

이래서 한달 동안 이영일이와 내가 정말로 그적은 월급에서 전세뻐스를 세내어 후배들을 출근시켰는데 (우리 월급에서 거이 20% 빠져나갔지 않았나 싶다.), 그후의 첫월급을 받아보니 뻐스값 만큼 월급이 올라가 있지 않은가? 정말로 뒷통수를 한번 얻어맞은 기분이었고, 보스가 정말 멋있어 보이고, 그의 인간성에 존경심이 저절로 울어나게 되었었다. 공식적으로는 비논리적인것은 철저히 배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인정사정도 볼줄아는 멋있는 미국인들을 나는 보았다.

Training Supervisor 쎄미코어에 처음 들어오는 아가씨들을 두주일씩 교육시켜 라인으로 보내는일을 두어달 했드니, 이제 너는 IE 하라고 했다. IE 뭐냐고 물었드니 Industrial Engineer란다. 요새는 이것이산업공학"이라는 이름으로 공과대학의 하나의 학과가 됬지만, 그때의 한국에서는 그런것이 있는지도 몰랐었고, 나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면서, 사람을 Training Supervisor 임명하여 내밑에 넣고, IE외에 생산라인의 생산설비 정비도 내소관으로 하여, 정비공들을 전부 내밑에 넣겠다고했다.

그러고 보면 틀림없이 승진은 승진 같은데, 미국회사에서는 과장이라는것이 불분명하여 과장이라는 말을 거이 안쓰기 때문에, 새직책이 사원급인지? 과장급인지? 아리숭 다리숭 했다. (미국에서는 Section Manager 말을 공식적으로는 쓰지않는다. Supervisor Engineer위는 Manager, Manager 하도 광범위하여, 한국식으로 얘기해서 계장급도 있고, 과장급도 있고, 부장급도 있고, 부하가 한두명밖에 없는 Manager 있고, 수천명이 있는 Manager 있다. 그위가 Director 이것도 한국식으로 이사, 상무, 전무 모두 합처서 그저 Director이다) 어쨋든 사원이면 어떻고 과장이면 어떤가? 원래 그런거에는 관심이 없는 나니까, 부하가 많이 생기고 범위가 넓어졌으니까, 승진으로 간주하고 새직책의 일을 시작했는데,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IE 뭔지를 알아야 I E를하든 You E 하든 할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명색은 IE인데, 뭔지를 알수있는 란인설비의 정비와 새로 들어온 아가씨의 Training 치중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든 어느날, 보스인 Mr. Silverstein 이공장의 생산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라고 했다. 그런것 한번도 해본일 없고, 어떻게 계산하는지 방법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안가르켜주고 계산하란다. 또한번 대한남아의 체면상 모르니 가르켜달라기도 싫어서 무조건 OK했는데, 몇일을 두고 궁리를 해도 모르겠었다. 그러다가 각기계의 시간당 생산량이 얼마니까 거기에 기계대수를 곱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가 생겨서, 그런식으로 공정마다 계산하여, 제일 생산능력이 적은공정을 기준으로 이공장의 능력이 이것아니냐고 계산한것을 보여주었다.

그랬드니 아무말 없이 그것을 한참 드려다 보든 보스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주는데 자기가 계산한 생산능력이었다. 그것을 놓고 그제서야 교육을 하는데, 작업자의 피로도가 있으니가 5% 감하고, 현미경 보는 공정은 현미경 때문에 눈이 피로해지니까 3% 감해주고….. 이런것 진작 가르쳐주고 하라고 그랬으면 쉬웠을테고, 같으년 우선 교육부터 해놓고 뭐를 하라고 할텐데, Mr. Silverstein 그렇지를 않았다. 매사를 우선 하라고 해놓고, 해놓으면 설명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못했다는 질책이 아니고, 형님이 아우한테 가르치듯 친절하고 웃으면서 가르쳤다. 이러면서 내가 배운것은 "우선 실수를 하게하라. (그것이 큰일 저지를 실수가 아닌한) 사람은 손잡고 가르킨것 보다 자기의 실수를 깨달을 때에 기억에 남고, 모르면서라도 노력하는 동안에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쉽고,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른다는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어, 그후에 설명을 들으면 자기에 필요한 내용을 빨리 흡수한다" 사실이었다.

이런식의 훈련을 받으면서 몇달이 지나 이제 뭣좀 알게 됬다고 생각했는지, 하루는 안전에대한 책을 댓권 주면서 이회사의 안전규정을 써보라고 했다. 영어실력으로 그두꺼운 책을 읽으려면 몇달은 걸릴텐데 언제 그것들을 읽고있단 말인가? 대충 훌터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언제 안전규정이라는것을 구경한 일도 없으니… (요새도,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안전불감증으로 사고가 많이 나지만, 모르긴해도 1967년에 안전규정이 있는회사는 아마 하나도 없었을것 같다) 일주일을 꿍꿍 앓다가 대한남아의 기개고 위신이고 이번만은 할수없이 백기를 들고, 못하겠다고 책들을 돌려줘 버렸다. 그랬드니 별말도 없이 그때부터 자기가 앉아서 쓰기 시작하는데, 아침 6시에 출근하여 저녁 10시에 퇴근을 하면서 일주일은 썼든것 같다. 우선 몇시간을 자는건지 그의 체력에 두손 바짝 들었다. 그러고도 피곤하거나 졸린 기색이 전혀 없으니, 이것은 무쇠로 몸인지? 그러면서 느낀것이 역시 고기먹고 자란 사람과 김치먹고 자란 사람의 체력의 차이가 이것이 아니겠느냐 싶어, 집에가서 마누라에게 애들 고기 먹여 키우자고 했드니, 자기는 일하는 사람이니까 고기를 먹어야하고, 애들은 애들이라 먹여야하고, 자기는 언제 차례가 오느냐고 해서 웃었든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래서 일주일을 중노동을 하고 나를 부르드니, 거의 백장은 실히될 종이를 주면서 사장비서에게 갖다주고 타자를 처달라고 하란다. 알겠다고 받아서 사장실로 가면서 훌터 보다가 마지막장을 보고, 서버렸다. 또한번 뒤통수를 강타당하여 발길이 안떨어졌다. 마지막에 있는 글이 “Prepared by D. I. Cho”였다. 고생은 자기가 하고, 공은 부하에게 돌리는 Mr. Silverstein. 이것을 쓰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이때 나는 백년을 배워도 못배울것을 순간적으로 배웠다. “일은 내가해도 공은 부하에게 돌리고, 실수는 부하가 해도 내실수로 돌려라. 높은사람의 실수는 회사가 쉽게 눈감아 주어도, 밑의 사람의 실수는 문책하는것이 통례니까, 실수는 뒤집어 쓰고 부하를 보호하라. 공은 부하에게 주어, 부하의 신뢰를 얻어라. 실제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것은 부하이고, 부하의 공은 결국은 그조직의 공이되고, 결국은 나의공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이얼마나 값진 교훈인가? 이것을 배우는데, 비싼 수업료도 안냈고, 강의를 듣지도 않았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그후 부터 이것은 나의 철저한 경영철학의 하나로 굳었다.

이렇게 몇달을 지나드니, 그가 부임한지 6개월후에, 이제 그만하면 나에 대한 훈련도 충분하디고 느꼈는지, 나를 자기 자리로 승진시켜 놓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입사 6개월만에생산기술부장"으로, 이제는 공장건물과 부수시설물의 관리, 안전, 보안등의 책임이 추가되, 생산라인의 여공관리, 생산량의 숫자관리를 하는 생산부와 제품기술, 공정기술 그리고 품질을 담당한 기술부의 업무를 빼고는, 온갖 잡동산이 업무는 모조리 내소관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잡무부"라고도 불렀지만), 사장인 Mr. Clevenger(나를 인터뷰하든)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로 올라섰다. 이러한 Mr. Silverstein 아무리 생각해도 멋진 보스였고,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드는 천재였고, 내평생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덕택에 이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숫자에 바탕을 미국식 경영을 최단 시간내에 철저히 배울수 있었고, 이것들은 그후에 평생을 따라다니며, 언제나 어려움을 당하면 이런 때에 Mr. Silverstein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그후의 나의 성공의 반이상이 그의 공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런 보스를 일찍 만난것이 나의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생산기술부장으로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기 시작하고, 두달 지났을까? 하루는 사장이 내자리로 오드니, 종이와 펜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왜그러나하고 따라갔드니, 현장을 한바퀴돌면서, 하나 하나 고쳐야할 점을 지적하는데 거짓말 하나도 한보태고 거이 150가지였다. 정말 이때까지는 우리공장이 어떤 공장보다도 잘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적을 받고 보니 그렇게 엉터리일수가 없었다.

반도체공장의 작업장에는 아가씨들 앞에 드라이 박스라는 자재 저장 선반이 있는데, 먼지가 들어가면 안되니까 앞에 유리창이 달려있고, 자재를 꺼내고 넣을때 이외에는 창이 항상 닫혀 있어야 먼지가 안들어간다. 그런데 함께 돌다 보니 거이 1/3 창이 아예 안닫혀 있거나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한시간에도 몇번씩 자재를 넣고 꺼내다 보니 아가씨들이 무심코 제대로 닫은거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무심코 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드라이 박스는 3인용으로 작업대도 한대가 3인용이라 작업대하나에 하나씩 있는데, 작업대가 여러게 한줄로 있으니까 이것도 여러개가 (5-6) 한줄로 놓여있다. 사장얘기는 한줄로 놓인 이것들이 삐뚤 빼뚤이냐는 지적이다. 이것들은 원칙적으로 똑바르게 놓이도록 되어 있는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원칙은 그렇지만, 아가씨들이 수없이 자재를 넣고 빼면서, 유리창을 열고 닫고 하다 보니, 처음에는 똑바로 놔주어도 한두시간 지나면 자연히 일직선이 아니고 삐뚤 빼뚤해질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장 말은 원칙이 그러면 그것을 지키고 유지해야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또한번 논리는 맞는 논리인데, 한두명도 아니고 수백명의 아가씨를 상대로 유리창은 항상 제대로 닫혀있어야하고, 드라이 빅스는 일직선에서 움직이지 말아야하고…. 정말 환장할 노릇이고, 될일을 하라고 그래야지

그런데 이것은 약과이고, 그후가 점입가경이었다. 벽에 못이 하나 박혀있는데 아무것도 걸린것이 없다. 사장 말씀이 이못이 왜 있느냐? 무언가 걸기위해서 박았으면 뭔가가 걸려있든지, 더이상 필요 없으면 빼야할것 아니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가씨 생산기계 앞에 드라이버가 한개 놓였는데, 그작업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장 공구는 작업중이거나 쓰지 않을 때에는 공구상자 속에 있어야지 주인도 없이 이곳에 혼자 있느냐? 정말 환장 하겠다. 벽에 금이갔는데, 이런 금간것은 없는것이 원칙아니냐?, 페인트로 때우든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느냐? 줄줄이 논리상으로는 옳으신 말씀인데, 그게 중요하다고, 사장이 부장 데리고 한시간이 넘게 시간 낭비하고 있나?

어쨋든 사장님 말씀인데 어찌하오리까? 150개쯤 지적을 받고, 여공과 정비사들에게 비상을 걸어, 전부 재훈련시키고 사장의 지적사항을 전달하고 즉시 시정작업에 들어갔다. 나도 하루에도 몇번식 라인을 돌면서, 사장의 관점으로 관찰하면서 눈에 뜨이는데로 지적하고…. 이러고 일주일 지난후 사장이 오드니 종이와 펜을 들고 따라오란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어, 지적사항이 많이 줄었는데 여전히 50-60개는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기가 났다. 에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요다음에는 하나도 안나오게 하겠다. 이래서 내가 나에게 비상을 걸고, 식음을 전폐하고는 아니지만, 만사를 제처놓고 이일에 전념하여 하루에도 수십번 공장을 돌며, 드라이 박스 창열린것, 삐뚜루 놓인것 끊임없이 잔소리하고 다녔다.

한두주일후에 (일부러 시간을 더준것 같다. 아무래도 잔소리한 직후에는 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이해 지는것이 인간의 속성이니까) 돌자고해서 또한번 사장하고 돌았는데, 그래도 제로화는 못했지만 지적사항이 열개도 안되었다. 이러고 나니 사장도 기가 막힌 모양이다. 단시간 내에 이렇게 까지 개선되리라고는 자기도 기대를 못한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후에는 단한번도 순찰을 하자고 한일이 없었다. 결국 결과는 완전히 나의 승리였는데, 문제는 사장이 이런짓을 했을까?였다. 이런것들은 드라이박스 유리창 닫아놓는것 외에는 하나도 제품에 영향을 줄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완전한 시어머니 잔소리지, 그들이 좋와하는 논리상 전혀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아닌가? 그런데 합리적인 그들이 그런 낭비를 이는 없고…. 이것도 특성이지만 공연히 인간이 왜사느냐? 일년을 고민했듯이, 해답이 안나오면 해답이 나올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고이것도 일주일이 넘게 생각해보았다. 그러고야 드디어 깨달았다. (고민도 잘하고, 깨닫기도 잘하고...)

반도체는 정말 정밀공업이다. 10 마이크로 미터 (10만분의 1 mm)라는 (요새는 마이크로미터의 다시 1000분의 1 나노 미터)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크기와의 전쟁이다. 그러니까 모든것은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해야 하는데, 남이 정신을 차렸는지 무심코 하는지 곁에서 봐서는 모르고, 사람을 하루 8시간 정신을 차리게 만들려먼 이런것들을 제대로 해놓게 해야한다. 아무리 정신 차려 일하라고 백날 얘기해봤자, 정신 차려지는것이 아니고, 이런것을 체질화 시켜놓으면 저도 모르게 매사를 유심히 살피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 간접적으로 모든사람을 긴장시키고, 긴장을 하고있는지, 해이해저 있는지가 눈에 뜨이게 하는것이, 유리창이 항상 완벽하게 닫혀있는지 아닌지나 그외의 그의 지적사항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그러면 그렇다고 교육을 안하고, 이런식으로 사람을 골탕을 먹이고, 설명도 안해주고그것도 이유가 있다. 자기스스로 깨닫는것이 가장 좋은 경험이고, 머리속에 박힌다. 말로 설명을하면, 대개 사장의 잔소리라고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리는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런 생각도 못하고, 이런 일을 일과성으로 지나버리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이 안통하겠지만, 아마 사장은 내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것을 인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또하나. 하루는 못이 서너개 필요해, 한근의 구매요청서를 써서 구매로 보냈는데 이것이 사장결재를 위하여 사장실로 모양이었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고 딴것과 함께) 사장이 찾는다기에 갔드니, 이못은 무엇에 쓸거냐기에 이런 이런곳에 쓸거라고 대답했다. 그럼 몇개나 필요하냐?기에 지금은 서너개만 필요하지만, 한국에서는 못은 보통 근으로 거래하고, 한두개씩으로는 안산다니까, 한두개씩은 안파느냔다. 팔기는 하지만 단가가 훨신 비싸진다고 하니까, 그논리가 나왔다. 서너개밖에 안쓸못을 근으로 사다가, 쓰고 남은것은 창고에 보관해야할텐데, 창고에 보관하려면 새로운 항목으로 장부에 추가되야하니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의 인건비 낭비고, 어딘가 선반에 올려 놓으면 자리잡아 자리낭비고, 이런일이 많으면 창고 좁다고 창고 더짓자고 할테고…. 네가 정말 필요하다면 융자를 해서 백만불이라도 얻어 주겠지만 이런 낭비는 일전도 못하겠단다. 정말 기가 차지만 역시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알았다고 구매요청서를 철회하고 못세개의 구매요청서를 다시내어 세개만 사다 썼다.

그러고 나니 이것 화가나서 못견디겠다. 이런 시시콜콜한것 까지 사장이 잔소리를하니 견디겠나? 그래서 또한번 대한남아의 오기가 발동했다. “앞으로는 네가 내가 싸인한 구매요청서에 다시는 브레이크를 못걸게 하겠다.” 그후부터는 모든 구매요청서를 사장의 관점으로 일일히 검토하여, 그런 관점으로 브레이크가 걸릴만 한것은 전부 수정하여 올렸고, 이후에는 단 한번도 사장이 내가 싸인한 구매요청서를 부결한일은 말할것도 없고, 의문을 제기한 일조차 없었다. 사장과의 싸움에서 또한번 승리한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장의 그논리에는 100% 동감했고, 회사는 그렇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철저히 믿게 되어, 그의 논리적 사고가 나한테 깊이 박혀버렸고, 나는 그를 위대한 선생님으로 존경했지 절대로 그가 잔소리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나를 훈련시키는 방법이었다고 믿는다. 

이러면서 생산기술부장 생활을 일년쯤한 1968 여름에, 사장이 부르더니 Local Sales Manager 해줘야겠단다. 그당시에 한국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메이커들이 많이 있었는데, 제일 큰것은 물론 금성사였지만, 국내판매보다는 보세가공 수출업체로 남성전기와 신성전기의 두회사가 컸고, 그외 이름도 없는 군소업체들이 많았다. 그래서, 훼어차일드도 대방동 공장에서 만든 트랜지스터를 테스터로 걸러 합격품은 Prime Product라하여 미국 본사로 전부 보냈고, 등외품을 Fall Out라하여, 싸구려 라디오 메이커에게 팔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Local Sales Manager 서울공대 동기 동창이 있었는데, 쎄미코어 보다 일년쯤 늦게 광장리에 공장을 세운 모토롤라가, 이친구를 스카웃해가서, 그후임으로 나보고 Sales Manager 하라는것이었다. 그는 서울공대 출신이기는 해도, 사교술에 능난하고, 술도 잘먹고, 놀기도 잘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Salesman인데, 나는 술도 못먹고, 사교술도 없고, 아무리 봐도 영업하고는 거리가 먼것이 아니라 180 반대의 성격이라, 내가 영업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인간인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내가하다가는 훼어차일드 세일스를 망치기만 하겠다고 얘기했는데, 사장이 우리는 Salesman 필요한것이 아니고, Sales Engineer 필요하다면서, 자기가 보기에는 회사를 통털어서 내가 제일 적격이라고 본다면서, 감언이설로 꼬이는것이었다.

그러면서 조건으로, 경비는 Open Account 네마음대로 얼마든지 써도좋고, Sales 자동차를 하나 사서 전용으로 운전수까지 딸려 붙여 주겠단다. 그때 내나이 33. 그때 한국에서 자가용은 물론 아무도 없었고 (이병철씨차도 명색은 회사차였을 테니까), 나이 33세에 회사차를 전용으로 배정 받은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었든것으로 안다. 그러니 제일 귀가 솔깃한것이 자동차였다. 그래서 또한번 만용을 부려 부디쳐보기로하고, 그일을 받아드리는 대신, 생산기술부장자리를 3개월만 공석으로 할것, 그래서 3개월내에 내가 뭔가 팔수있으면 계속하고, 3개월이 지나도 하나도 못팔면 도로 그자리로 돌아가겠다는것을 전제로 Local Sales Manager자리를 수락하였다.

이래서 자동차가 탐이나 판매업무를 맡고, 전임자와 함께 고객들을 한바퀴돌며 인사하고, 엉터리 영업활동이 시작되었다. (지나가든 새가 들어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당시는 술집이 전부 무교동에 몰려 있었고, 그래도 영업을 하려면 고객들 술대접을 많이 해야한다는것은 얘기들어 아니까, 뻔질나게 술먹으로 가자고 무교동으로 모시고 가서 일주일에 두세번은 무교동 출입을 했다. 다행이 한국에는 술집에를 가면, 아가씨가 손님하나에 하나씩 붙어 앉으니까, 짝에게 미리 귓뜸을하고 내술은 네가 대신 먹으라고하고, 미리 별도로 얼마를 집어주면, 아가씨가 손님 눈치 봐가며 술잔을 비워줬고, 나는 손님 눈치 보아가며 함께 취한척 연기를 하면 그럭 저럭 넘어 갈수 있었다. 나중에 이력이 나서 술주정을 어찌나 잘했든지 (멀쩡한 정신으로), 어떤손님은 거이 일년을 내가 술을 먹는줄 알았단다. 이쯤되면 연기술도 괜찮았든 모양이었다. 어쨋든 이런식으로 영업활동을 했는데, 시작한지 두달도 안되어, 아직 직업에 익숙해 지지도 않았는데 대한전선 사건이 벌어젔다.

대한전선이 보세가공으로 라디오를 만들고 있었는데 고객에게서 대형 주문을 받아 30만불어치 트랜지스터를 사겠다는것이었다. 그때 한국시장의 일년간 총매출이 고작 백만불 정도였으니 30만불이면 엄청나게 양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모토롤라와 내가 정면 충돌을 할수 밖에 없었다. 5+1이라하여 트랜지스터 5개와 다이오드 1개를 셑으로하여, 처음 35쎈트에서 시작된 값을 서로 1쎈트씩 내리다 보니까 26쎈트까지 내려가 버렸다. 이렇게 내리다가는 끝이 없겠다. 그때 대한전선 공장장이 우리 서울공대 선배였는데, 양반이 유유부단하여 결정을 못내리는 동안에 이렇게 값이 내려가 버렸다. 아무래도 안될것 같기에, 공장장에게주문양이 커서 결정하기 어려우신것 같은데, 내가 사장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요. 사장님과 내가 결정 짓겠읍니다"라고 제안했드니, 마음 약한 공장장이 그렇게 하겠다고하여, 대한전선 사장이었든 설경동씨를 남대문로 본사에서 만났다.

그때 그분의 연세가 얼마나 되셨었든지?, 30대의 내눈에는 완전히 할아버지였다. 설사장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 이상 가격을 내릴수는 없으니 대한전선이 적정한 가격을 정해 주십시요. 그가격에 주문을 받아도 되면 받겠고, 너무 싸서 못받겠으면 포기할테니 모토롤라에 주문을 주십시요"라고 말씀을 드렸드니............... 정말 의외의 대답이었다불과 얼마전까지 훼어차일드에서 녹을 먹고 있든 놈이 훼어차일드를 배신하고 경쟁을 해서 가격을 그렇게 떨어뜨려 ? 내가 미국 사람 피빨아 부자되고 싶어하는줄 아나? 공장장. 가격에 관계 없이 당장 훼어차일드에 주문 !!!” 불호령 같이 화를내며 명령을 하는데는 나도 어안이 벙벙했고, 공장장도 기겁을 하고,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것이 한국의 윤리 도덕에 철저한 노인 양반들의 사고방식이구나 하는것을 새삼 절감하며 대한전선 공장으로 돌아와, 그자리에서 30만불짜리 주문서를 받아들고 회사로 돌아왔으니, 약속에 따라 이제 싫든 좋든 Local Sales Manager 할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이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Local Sales Manager 1년반을 하였는데, 그동안 술집 들랑거리느라 고생도많았지만 재미도 많았다. 영업으로 자리가 바뀌면서, 공식적인보스는 Mr. Clevenger 아니라 훼어차일드 본사영업 동경지점의 Lyle Ronald라는 극동담당 Sales manager 바뀌었는데, 호주가 국적인 친구가 한없이 좋은친구였다. 일년에 서너번은 일이 있으니 일본을 다녀가라고 텔렉스를 보내온다. 그러나 일본의 입국사증을 받으려면 한달은 걸리든 때라, 손쉬운 홍콩사증을 받고 일본의 통과사증을 신청하면 하루면 나왔기 때문에, 일본을 오라면 홍콩까지 들렀었다.

일도 없이 홍콩이니까, 이것은 완전히 놀러간것이 되고, 홍콩에도 훼어차일드 공장과 영업사무실이 있으니까, 거기 영업사원과도 어울리고, 생산기술부장 때에 홍콩가서 친해진 공장 기술자들과도 어울리고재미있게 며칠 놀다가 동경에를 가보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것을 공연히 오라고하여, 형식상 한국 보세가공회사에 주문을 주는 일본회사에 삐끔 얼굴 내밀어 인사나 하고, 며칠 있다 오면 되는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저녁 시간에는 제일 비싼 요리점에가서 실컷 먹고 자기 크레딧 카드로 그으면, 크레딧 카드영수증과 정식 영수증 두개를 받아, 정식 영수증은 나를 주고 한국에 돌아가서 회사에 경비 처리하고 그돈으로 (결국 $150정도의 저녁값을 자기가 냈으니까 나한테는 공돈 생긴것이다.) 마누라 선물 사다 주란다. 논리는 Salesmen 시도 때도 없이 고객이 불르면 가야하니까, 마누라를 구어 삶아 놓아야 가정에 불화가 없어지고, 그래야 내가 Sales 전념할수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도 마음대로 식구를 좋은 식당으로 자주 데리고 가란다. 경비는 결국 자기가 싸인하는것이니 걱정 말란다. 이래서 훼어차일드가 망했는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미국 회사에서는 Salesmen들의 경비문제만은 Salesmen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어느회사나 굉장히 관대하다.

이렇게 한국의 보스나 일본의 보스가 다함께 경비에 관대하다보니, 겁날것도 눈치 볼것도 없고, 전용차도 있겠다, 팔도강산 도라다니며 놀러도 잘다녔고, 워커힐 같은 일류식당도 잘가면서, 마누라 호강도 시켜주고, 매일 주머니에는 십만원 짜리 보증수표 대여섯장은 항상 넣고 다니면서, 돈도 썼다. 금성사가 고객이다 보니, 금성사의 친구들이 생각만 나면 문제가 있다고 텔렉스를 보내와, 때마다 부산으로 비행기 타고 내려 가서, 동래 온천장에 대려가 술도 자주 사주고 돌어왔고, 내돈도 아닌것을 이렇게 쓰면서 돈을 헤프게 쓰는 버릇이 들어, ENJOY TODAY 인생관과 맞물려, 아직도 돈쓰는것은 어는정도 헤픈편이 되고 말았지만그렇지만 내가 원래 술을 싫어 해서, 아무리 경비를 사용으로도 썼다해도, 아마 좋아하는 전임자가 쓴것보다는 그래도 적게 쓴것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Sales를하면서 배운것도 많았다. 우선, 반도체경기가 어떤 주기로 어떻게 변하는냐? 시장경제학 공부도 되었지만, 그보다도 제일 크게 교훈을 얻은것은,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할런지는 몰라도, 영업이란 사교술이나 술대접보다도, 정직과 성실이 효과를 낸다는 사실이었다.

모토롤라는 명동의 유네스코회관에 멋있게 카펱이 깔려있는 넓직한 사무실을 얻어놓고, 예쁜 여비서 앉혀놓고 사교에 능했지만, 나는 공장의 생산관리 옆방에 조그만 사무실을 가지고, 매일 생산보고서 보아가면서 앞으로 생산에서 나올 제품계획을 매일 매일 체크해가면서 영업을 했다. 이러다보니 모토롤라는 명동과 광장리에 떨어져 있어서, 전화로 생산관리가 말하는대로 믿고 일하면서, 자기의 과장까지 곁드려 고객에게 공급약속을 했지만, 나는 생산관리의 설명 없이 판단으로도 언제 무엇이 얼마나 나올것인가를 판단할수 있었고, 모토롤라의 공급약속은 빵꾸가 잘나 고객의 공장라인을 세우는수가 가끔 있었지만, 나는 공급이 딸릴상 싶으면 당장 옆방의 생산관리와 얼굴을 맞대고 생산스케쥴을 조정하기도 했고, 그래도 안되는것은 아예 고객에게 주문을 받겠다고 처음부터 거절을 했으며, 제품이 제때에 안나오면 내가 생산라인에 지키고 섰다가 나오는대로 내차에 싣고 한밤중이라도 직접 배달하기도 했기 때문에 단한번도 고객의 생산라인을 세우는 일은 없었다.

혹시 제품에 품질문제가 있으면, 미리 미리 사전에 고객에게 알려, 그들이 사전에 대처할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고객에게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을수 있었지만, 모토롤라는 문제가 있어도 이를 감추려 하다가, 고객의 제품에서 뒤늦게 탄로가 나서 고객을 골탕 먹이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첫해에는 고객들이 나를 몰라서 고생을 했지만, 다음해인 1969년에는 일년 매출이 백만불을 넘어서, 한국시장 점유율이 95% 넘어섰고, 모토롤라는 국내판매가 거이 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여기서 배운 성실 정직의 판배원칙은, 후일 삼성에서 고객 써비스를 하면서도 철저히 활용하여, 삼성 제품 판매에 역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다가 19702월을 마지막으로 33개월을 근무한 쎄미코어를 떠났지만, 쎄미코어는 내평생 잊을수 없는 학교였고, 후일 KMI공장, 대만에서의 TMI공장, 삼성 공장등에서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릴수 있었든 기본을 확립하여준 교육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