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1986 두번째의 미국생활

 

대만에서 돌아온 1978년부터, 삼성에 입사하여 한국으로 되돌아 간 1986년 까지의 8년간은 그저 평범한 두번째의 미국생활로, 안정기라고나할까 특별히 해놓은것도 없고, 회사에서도 성공 실패를 따질만한한 일도 하지않았었다.

대만에서 돌아와, 이제는 AMI 덕분에 영주권을 얻어, 미국에 영주하게 되었으니, AMI의 주택이나 자동차에 대한 혜택도 없어저, 처음으로 미국에서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사고 (그것도 한대만이 아니고 두대씩이나 사야했고, 애들이 크면서 다섯대 까지 늘어났었다.), 매달 집과 자동차의 활부금과 보험료도 내고, 월급만으로 살자니 더 빠듯해젔었다.

AMI내에서의 일은 역시 KMI Support Manager로 복귀하여 KMI 뒷바라지 해주는 일이어서, 별로 바쁘지는 않은 일이었고, 이러면서 KMI 옛 친구들 출장오면 함께 어울려 가까운 곳에 놀러도 가고, 집에서 15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Palo Alto Hills Country Club의 회원권을 사서, 함께 회원이든 한국인 두집의 부부들과 토요일 일요일에는 골프치고. 화요일 목요일에는 정해놓고 회사에서 돌아오는길에 집근처 연습장에가서 골프연습하고 집에 돌아오고, 서너집이 아주 가깝게 지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모여 포커도하고, 이러면서 지났다.

미국의 칸트리클럽은 한국과 달라, 350명 정도 밖에 회원이 없고, 회원권은 역시 사고 파는데, 팔때에는 판값의 40%를 클럽에 기증하여야 하니까, 회원권 값이 거이 배가 되기전에 팔면 미찌는 꼴이된다. 그대신 회원수가 적고, 350명이라해도 열심히 안치는사람도 많으니까, 아무때나 예약 없이 가도 30분이상은 기다리는 경우가 거이 없다. 매달 일정 회비를 치든 안치든 내야하는데 ( $600정도), 이것만 내면 Green Fee가 없어, 많이 치면 칠수록 싼값에 친꼴이 된다. 내외가 매 주말에 이틀을 치면 일주일에 네번을 치는 셈이고, 한달이면 16번인 셈이니까, 한번 치는데에 $40도 안되는 꼴이다. 거기에 여자들은 주중에도 치니까, 결국 한번 치는데에 $30도 안내는 셈이된다. Palo Alto Hills Country Club회원권은 한국에 돌아갈 때에 팔았는데 그간 회원권 값이 많이 올라, 40%를 클럽에 주었어도 밑천을 빼고도 그동안 낸 월회비를 (그때는 월 $200정도) 거이 상쇄할수 있어, 5-6년간 완전히 공으로 골프를 친 셈이되었었다.

대만에서 돌아와 일년쯤 지났는데, KMI내에 문제가 많으니 몇달동안 한국에 가서 도와주는것이 좋겠다고하여, 애들 방학도 되었고, 회사를 구어 삶아 온가족이 서울의 하얏트호텔에 가서 묵으면서 두어달을 서울에 가 있었다. 내가하는 방법은 주로 근본적인 개선을 하는것이라,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두달 정도로는 별로 큰 도움은 못 주었지만, 응급조치로 큰불만 대충 끄고, 충고만 하고 돌아올수 밖에 없었고, 이동안에도 설악산으로, 경주로, 애들을 대리고 KMI 차를 빌려 한바퀴 돌면서, 애들에게 한국의 현장교육도 시켰다. 그러면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누이를 초청형식으로 함께 데리고오면서, 하와이를 들르고, 이곳에 와서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을 시켜드리고, 동부로 성구네에게 보내서 동부 구경도 하게하고 한국으로 보내드렸는데, 이제 돌아가신 큰누나를 생각하면,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해에는 넷째 아버님 내외분이 오셔서, 이근처와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 모시고다니면서 구경을 잘 시켜드렸는데, 뉴저지 집으로 되돌아 가신지 한달도 안되어 넷째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놀란 일이 있었고, 금성사 사장이었든 박승찬씨가, AMI과 합작으로 반도체 회사를 만들겠다고 AMI 사장과 협상차 와서, 우리집에서 함께 고스톱도 치고 했었는데, 이분도 귀국한지 몇일 안되어 시차 조정도 안된 상태에서 가족을 태우고 놀러 갔다 오는길에 고속도로에서 졸면서 운전하다 사고를 내어, 내외가 함께 타계하여 또한번 놀란일도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이 기간중에 일어난 최대 사건은 나의 일생 일대의 대 실패작이었든 새집 짓기였다. 나는 원래가 전망 좋은 집을 좋아하는데, 우리집 근처에 Silicon Valley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집터를 사서, 새집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거이 일년이 걸려 이상적인 집을 지었었다. 아래층에는 거실, 응접실, 부억들만 놓고, 침실은 2층에 모두 배치하였고, Valley가 보이는 쪽에는 모두 커다란 유리창이나 유리문으로하여 Valley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오도록 하였었다. 집색도 페인트를 쓰지않고, 나무색을 그대로 살렸고, 응접실 위에는 2층을 없애고 천장을 지붕높이 까지 높여 시원하게 만들었고, 2층에서도 응접실 전부가 내려다 보이게 했었다. 내딴에는 내 마음에 꼭맛게 멋있게 진 집이었는데, 처음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주택 융자 이자율이 7-8% 수준이었는데, 일년 동안에 이자율이 미국 역사상 최고인 18%까지 뛰어 버렸다. 미국은 원래 집을 살때에는 20%만 내고 (이것을 Down Payment라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10% Down, 또는 0% Down이라하여 한푼도 안내고 전액 융자하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는 은행 융자를 하여 활부금을 내야하는데, 보통은 30년 상환으로 일정한 활부금을 매달 낸다. 이래서 처음에는 95%이상이 이자이다가, 매달 이자 부분은 줄고 원금 상환 부분이 늘어서, 30년후에는 전액 상환이되는 계산 방법이다.

내가 가진 현금을 있는대로 총동원하여 이집 짓는데에 투자 했었는데, Oil Shock의 여파가 이때까지 끌어, 다른 경제지표보다 오히려 뒤딸아가는 성격이 있는 주택융자 금리가 뒤늦게 높아져, 7-8%아니면 기껏 높이저야 10%를 넘겠느냐고 시작한것이, 18%까지 올라갔으니, (역사적으로 미국의 주택융자 활부금은 6-7%가 정상이고, 여간해서 10%를 넘는일은 없었다. 지금은 연방은행의 저금리정책 때문에 5.5%까지 내려갔다가 6%를 조금 웃돈다.) 매달 활부금이 2.5배로 높아젔고, 내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 할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한번도 살아 보지도 못하고 팔수 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내가 그동안 모아 놨든 재산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간것 빼고는 몽땅 날라가 버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을수도 있지만, 지금의 내 수준으로 환산한다면, 적어도 일이백만불은 조히 날린것과 같다고할수 있는, 그당시의 나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이것이 내가 일생에 겪었든 가장 큰 실패였지만, 나는 돈 날린것 보다, 그 집에 못 산것이 더 안타까웠다.

나는 원래가 어떤 실패를 해도 후회라는것은 해 본일이 없다. 한치 앞을 모르는것이 인생인데, 똑 같은 경우에 또 부디치게 된다면, 별수 없이 똑 같은 짓을 또 할것이고, 후회하며 밤세워 끙끙 앓아 봤자, 이미 끝난 일 도리킬수도 없다면, 후회하며 정력 낭비해서 득될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에게 과거는 앞 날을 위한 반성의 대상일 뿐 후회의 대상은 아니고, 반성이 끝나면 더 이상 생각을 않는다. 이런 큰 실패를 하고도 태연한 나를 보고 집사람이 놀랐지만, 이미 일어난것 도리킬수도 없고, 돈이야 아직 젊은데 다시 벌면 되는거고, 그저 그 집에 잠시라도 들어가 살지 못한것만이 못내 아쉬웠다. (그집의 현싯가는 이백만불을 넘는다.)

이 집 사건을 빼고는, 애들이 학교를 졸업하여 혹시 군수산업에 종사하게 되면 필요할것 같아서, 198651일부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는것 외에는, 이렇다할 특별한 일도 없이 그럭 저럭 8년이 지났는데, AMI가 사양 길에 접어들어, 1986년에 Santa Clara에 있는 본사와 공장을 폐쇄하고, 또 하나의 Wafer공장이 있는 Idaho주의 Pocatello로 전부 이전 하기로 결정 되었다. Idaho Utah주의 북쪽에 있어, 겨울이 길고 춥기도 할뿐 아니라 시골도 보통 시골이 아니고, 감자가 주산물로, 문자 그대로감자바위"이다. 그러니 이런곳에 따라 갈수도 없어서, 1970년 부터 한국 미국 대만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16년간 정들었든 AMI를 청산하고, 실직자 신새가 되버렸다. (이것도 놀으면 놀았지, 살기 싫은 곳에서 살기는 싫어서...)

이런 상태로 한 두달을 지났는데, 그동안 포커와 골프의 친구였고, 미국 삼성에 상무로 있든 이일복박사가 삼성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그때가 삼성이 DRAM을 생산 하기 시작 한지 2-3년 밖에 안되었을 때인데, 고객이 전부 콤퓨터 메이커들이고, 미국의 IBM, Hewlett Packard, DEC, Unisys, NCR등 일류 메이커들로, 삼성 제품의 품질이 너무 나빠 이들과 문제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으니, 품질을 담당하고 아울러 기술적인 면에서 Customer Service를 담당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일을 하려면 미국 회사와 미국인도 잘 이해 해야하고, 영어도 잘하고, 반도체를 기술적으로 알아야하고, 그런데 삼성 내에는 그런 일을 할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금성사에서 한국 회사는 데어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실업자 신세에 너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몇달을 매일 골프만 쳤드니 그것도 신물이 나고, 애들도 아직 여러 해 대학을 다녀야 하는데 재산을 많이 쌓아 놓은것도 아니고, 삼성은 그래도 한국 회사중에서는 경영을 제일 잘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금성사와 달리 가족 회사가 아니라는것이 가장 마음에 끌려, 한번 부디처 보자고 마음 먹고 삼성에 입사하기로 하여, 이일복박사의 주선으로 거이 반년의 실업자 생활을 끝내고, 1986 12월초에 내 혼자 우선 서울로 돌아가,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의 기흥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