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무선의 세계사

지금으로 부터 80년 전인 1895년, 이딸리아의 청년 과학자 말코니에 의해서 무선통신이 발명되자, 줄 없이 통신을 있는 무선통신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전기나 통신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무선통신의 실험을 순수한 개인적인 흥미로 손대기 시작한 것이 아마추어 무선의 시초였다. 지금은 G2HA라는 사인으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운용 하고 있는 영국의슨씨는 1899년 부터 아마추어선을 시작했다니, 결국 아마추어 무선 시조는 말코니 자신이였다고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아마추어 무선은 이딸리아에서 영국으로, 거기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퍼지기 시작 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무선통신이란 발명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운에, 사회적으로 이용되지도 못했고, 그저 아마추어들의 취미의 대상일 뿐이었다. 상업 무선통신 보다 앞서 이렇게 시작된 아마추어 무선의 초기는, 호출부호도 제멋대로였고, 거치장스라운 법률도 없었으니 정말 한가한 시기였다.

이런 식으로 십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좀 더 능률적인 통신이 가능할까? 하고 열심히 연구를 거듭한 햄들과 학자들의 협조로 무선통신은 차차 실용성을 띠게 되었고, 하나 상업선국이 늘어났다. 그러나 진공관도 없이 킬로왓트의 거대한 발전기를 돌려가며 불꽃 방전을 시켜 통신을 하던 초기의 무선통신에는 파장이 백미터 내지 천미터나 되는 장파를 쓰고 있었다. 당시의 이론으로는 단파란 옆집이나 갈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오늘과 같이 단파라야 원거려 통신이 된다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이론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장파를 쓰면서 무선국의 수가 하나늘어가자, 무선국 상호간의 혼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설도 원시적이였으니 이런신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무법의 전파를 통제할 필요가 생기게 된것이다.

l912선통신이 가장 활발하였든 미국은, 드디어 세계 최초의 전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중요하지 않은 농담이나 하고 있는 햄들을 파장 200미터 이하의 단파대로 쫓아 버리고 말았다.

전파법 HAM 200m 이하로 추방 함”

"아마츄어? 농담이라면 옆집하고나라지."

그러나 햄들은 굴하지 않였다. 

"200미터 이하? OK. 우리가 무선통신을 개척해 놓았으니, 장파는 물려주고 단파대를 개척해 주지"

이래서 단파대에서의 미국 햄들의 피 땀 어린 실험이 시작되였다. 그리하여 단파대에서의 통달거리는 하루 하루 늘어갔고, 곳곳에서 신기록이 수립되였다. 천 킬로미터, 2천 킬로미터, 3로미터....

무렵인 19l4년. 이미 수천명에 이르렀든 미국의 햄들은, 맥심씨의 제창으로 미국아마추어선연맹 ARRL(American Radlo Relay League) 조직하고, 조직적인 실험을 시작했으나, 불행히도 19l7년의 l 세계대전으로 모든 아마추어선국은 폐국 명령을 받아 중지 되고 말았으며, 당시 6천명에 이르렀던 ARRL 회원 중 4천명이통신의 경험을 군에원되고 말았다. 물론 유럽에서도 똑같이 많은 햄들이 군에 동원되었고, 이래서 아마추어선은 일단 세계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l9 세계대전이 끝나자, 군에서 더욱 기술을 연마한 햄틀은 전쟁후에 방출된 많은 무선기재들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하여 ARRL 에서는 l921 12월에 ARRL 회원 가장 우수한 햄이였던 2ZE에게 당시로서는 가장 고성능인 수신기를 주어 유럽으로 파견하그, 미국 햄들의 전파를 수신하게 했다.표는 대서양 횡단 통신이였던 것이다.

결과, 30국의 미국 햄들의 신호를 수신할 있었으며, 다응해인 l922년에는 300여의 미국 햄들을 수신할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도 프랑스와 영국 햄의 신호를 하나 기록할 있었다. 그러니 일방통행은 성공한 샘이다. 나머지는 완전한 교신이다. 그러나 기계나 전력은 당시의 기술의 한계까지 와있었다.

"그러면? 파장을 바꿔보자."

그러나 이러한 꾸준한 햄들의 노력을 무선계에서는 비웃고 있였다.

"200 미터 이하의 전파라고?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의 낭비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웃음 속에서도 그들의 노력은 쉬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에게 연구비를 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연구를 강요한 사람도 없었다.

"산에 올라가느냐고?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라고 어떤 유명한 등산가가 말했다지만, 무용지물이라고 버림 받은 단파대에서, 순전히 자기의 흥미와 정열만으로 l923 l1 7 드디어 미국의 lMO(현재 W9UZ) lXAM(지금의 K6BJ l964 1l월에 작고) 프랑스의 8AB 파장 20미터로 교신하는데 성공!! 드디어 대서양 횡단 통신이 단파대에서 이루어짐으로써, 당시의선계를 놀라게 했으며, 요늘날과 같은 단파 만능시대의 막을 올리게 했던 이다.

이렇게 햄들의 손으로 막을 올린 단파통신은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오히려 파장이 짧으면 짧을수록 원거리 통신이 잘된다는 결과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여러 학자틀이 연구한 끝에 드디어 "케네리"와 "헤비사이드"라는 사람에 의하여 "케네리비사이드 층"이라고 불리우는 전리층(이온층이라고도 )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히여 단파통신에 대한 이론도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소전력으로 원거리 통신 되는 단파대로 많은 상업국들이 옮아가 시작했다.

이와 같이 순전히 햄들의 손으 개척된 단파대가, 이제는 무선통신의 매인 스트리트가 되어 "무선통신"하연 "단파"라고 상식화되고 말았지만, 이것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햄들이 이론 제쳐놓고, 서로 도와가며 실험으료 이룩해 빛나는 기록인 것이다.

이러한 단파의 성공으로 원거리 교신이 쉽게 되자, 전세계의 햄들의 수는 부쩍 늘어나갔고, 드디어 1925년에는 그때까지 나라 별로 조직 되었던 아마추어 무선 단체의 통합체인 국제아마추어무선연합 IARU(International Amateur Radio Union) 조직되어, 초대 회장으로는 ARRL 회장이었던 WlAW 맥심씨가 겸임하게 되였다. 현재 이 IARU 63 회원단체가 있으며, 한국아마추어선연맹은 1961년에 가입되었다.

이렇게 퍼져나가던 아마추어선은 2 세계대전과 함께 또다시 세계적으로 숨을 죽여야 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세계 각국은 아마추어선을 중지시키고 말았으며, 대부분의 햄들은 또다시 군으로 연구소로 불려갔다. 그리하여 많은 햄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그들의 평소의 기술을 봉사하고는 영원히 올아오지 못하고 "사일렌트 키이 (Silent key, 햄들의 사망)" 기록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자 여기 저기서 아마추어 무선의 불길은 또다시 세차게 솟아 올랐다. 전쟁에 패한나라를 빼놓고는 세계의 아마추어 무선이 재개되어 "CQ CQ" 소리가 세계에아리 쳤다.

패전국가의 재개는 약간 늦어졌다. 제일 먼저 재개 된것이 l948년에 허가가 내리기 시작한 독일이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벽돌 헌납운동"이라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독일의들은 주둔군 사령부로 찾아가서 아마추어선국의 허가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선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이 보급되어 있는 미군들은, 이것을 승락하고, 당분간은허가로 전파를 내도 좋지만, 독일정부의 허가를 받으라는 말이였다. 이래서 그들은 우선 독일 아마추어무선클럽 DARC 주관으 아마추어선을 즐기면서, 독일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고, 그들의 성의를 표시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파괴된 독일의 체신부 건물의 재건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햄들이 모두 벽돌 한장씩을 체신부에 바치고 이것으로 빨리 청사를 복구하여 일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1948년에 드디어 독일정부는 아마추어선국의 허가를 개시했고, 뒤를 이어 이탈리아가, 그리고 195l년에는 일본이 허가함으로써 패전국의 아마추어 무선 개방은 실현 되었으나, 오히려 전승국이었던 자유 중국은 중공과의 싸움 때문에 아마추어선이 햇볕을 보지 못했다가 1964년에어서서야 겨우 하나가 허가 되였다.

현재 아직도 아마추어 무선이 금지되어 있는 나라가 몇군데 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공", "북한"등의 나라들로, 나라들에서 나오는 햄들의 전파는 모두가 불법 무선국으로 밖에 없으므로, 이런 나라와의 교신은 금지 되어 었다. (1991 현재로는 북한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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