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가 다니던 금성사에서 멀지 않은 부산 서면에서의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 경주 불국사에서.


서면 셋집 바로 옆에서 문을 연 "성일약국"
별로 돈벌이는 안됬지만 남편이 회사에 나가있는 낮시간을 보내기에는 좋은 일이었다.


한국 최초로 치약을 만들어 "콜게이트"를 이땅에서 추방한 럭키화학이, 신제품으로 손댄것이 플라스틱이었고(가정용 그릇들), 이플라스틱을 활용할 제품을 찾아서 손댄것이 라디오로, 이래서 한국최초의 전자회사인 "금성사"가 "럭키화학" 마즌편에 세워졌다. 그러나 갑자기 기술도 없이 라디오를 만들려니, 이론만 아는 대학출신 보다는, 오랜 "라디오방" 경험이 있는 고교출신이 더 유용하여, 기술직은 전부 고교졸업의 라디오방 출신으로 메꿔져있다가, 대학출신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입사하여 "설계실 주임"으로 일하였다.
(자세한 금성사 경험담은 제3부 "나의 경험담"에 있음)

 왼쪽 위   : 금성사 동료들과.
 왼쪽 아래 ; 럭키화학과(왼쪽) 금성사(오른쪽 빨간선 안에)가 양쪽에있든 부산진구 연지동길.
 아래 줄   : 옛날의 금성사 조립실 - 아직도 이런 작업실이 한국의 어딘가에는 있을런지? 에어콘은
               물론이고
난방도 제대로안되있는 쎄멘트바닥의 작업실에서 한국 최초의 라디오가 생산되었었다.


성구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든날 - 왼쪽부터 : 동욱, 큰누님 맏딸 명희, 큰누님, 큰누님 맏아들 상완, 둘째누님, 어머님뒤가 둘째누님 둘째아들 영서, 성구, 둘째매형, 넷째누님 동현, 둘쩨누님 큰딸 인혜.


부산에서의 신혼생활 2년동안에 찾아온 친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상단 : 왼쪽 - 바로 아래 처제 영혁.    오른쪽 - 성구.
하단 : 왼쪽 - 금성사 설계실 동료들.   왼쪽 - 서울서 찾아준 아마추어무선 친구와.


1963년에 금성사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TV수상기를(물론 흑백TV. KBS-TV가 막 흑백TV방송을 시작한 무렵임) 만들기위하여 일본의 히다찌(日立)사와 기술제휴를하고, 6명의 기술자를 일본 요꼬하마 도쓰까시에 있는 히다찌 TV공장으로 연수를 보내게 되어, 나는 설계담당으로 100일간 일본에 갔었다. (계획은 99일이었는데, 김포비행장의 짙은 안개로, 그때 운항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보잉 707 젵여객기가 착륙을 못하여 동경으로 회항했고, 동경서 하루를 더 잔후에, 다음날 프로펠러 비행기로 다시 떴으나, 여전히 짙은 안개로 규슈의 구마모도로 다시 회항하여 너댓시간을 대기하다가, 저녁때나 되서 겨우 서울에 착륙하였고, 이래서 꼭 100일을 채우고 귀국)이것이 나의 첫번째 외국여행이었는데, 신원조사 3개월 포함 여권을 내는데 반년이 걸렸고, 그때는 금성사 중역정도나 되어야 해외여행을 나갈수가 있었고, 대학 갓나온 우리나이의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한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때의 일본이 얼마나 신기하고 훌륭해 보였든지, 판매된지 얼마 안되어 무척 비쌌든 칼라사진을 찍느라고 출장비의 반은 날라가 버렸었다. (인화용 네거티브 필림은 너무 비싸 엄두도 못내고,슬라이드용으로만 찍었는데도). 한 친구가 마누라 팬티가 너무 좋와 보였든지 이것을 대여섯개 샀는데, 입국할 때에 김포세관에서 이것이 튀어나오는것이 창피하여, 모두 입고 들어왔다는것이 나중에 알려저, 폭소를 자아내고, 일약 유명해진 일화도 있었다.


부산생활 2년, 금성사근무 3년반만에 금성사를 사직하고 서울로 향하는 KAL 비행기속.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태워준다고 탔는데 별로 손님이 없어, 좌석이 넉줄밖에 안되는 소형 비행기도 이렇게 텅텅 비어 다녔었다.


서을로 돌아와서 결혼 기념일인 1964년 4/15에.


서울로 돌아 온지 얼마 안되어 4/29에 웅구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꼭 한달후인 5/29에 아버님이 돌가셨다.

할머니에 안긴 웅구 - 미아동 집에서


어느날의 웅구


한국에서의 최초의 여자아마추어무선사라 하여 KBS-TV의 "나는 누구일까요"에 출연.


신문에도 나고 ..............


영자 신문 Korea Herald에도 보도되었었다.


웅구 백일날


개구쟁이 웅구가 분유통을 찾아서 온방안에 쏟아놓고 줏어먹고 있다.


부산의 금성사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약 1년간은 한국최초의 민간방송이었고 삼성이 경영하든 "라디오 서울" 송신소 근무를하였고, 거이 24시간 방송을 하려니까 하루 24시간을 근무하고 2일을 쉬는 3교대근무를 했었다. 그러다가 "중앙상역"이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든 사장이, 미국 RCA와 기술제휴를하여 저희도 TV를 생산하겠다고 공장을 건설하여 운영을 맡아 달라고하여 이회사에 입사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정부의 특혜를 받기위한 사기극이어서, 3개월을 월급도 못받고, 쌤플로 들여와 있든 TV한대만 반작 들고 나와버렸다. 덕택에 우리집에는 상당히 일찍부터 TV를 갖일수는 있었지만, 월급 못받는 월급쟁이 경험도 해보았다. (1965년)


웅구의 돌날과 받은 선물들 - 이많은 신발들을 언제 다 신지?


아마추어무선 관련 책으로는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우정의 전파 - 아마츄어 무선 이야기" - 당시 한국에는 아마츄어 무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극히 소수여서, 이를 담당한 체신부 관리들도 잘 이해를 못하였기에, 이들을 개몽도할겸, 국내에 아마츄어무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발행했는데, 1965년 초판 발행이후에 인기가 좋와, 1973년에재판을 발행하고, 1991년에 다시 3판을 발행하였다.


 1965년 5월 17일에는 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 전세계 통신관계를 관장하는
UN산하 국제기구) 창립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 아마추어무선계의공로로 체신부장관의 감사장과
메달을 받았다.


1965년 10월 23일 충구 탄생


웅구와 충구


충구 돌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