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의 추억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200번지. 이것이 내가 태어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까지 산곳이다. 청산은 내가 만해도, 인구 20,000 면치고는 농촌이었는데, 이제는 인구가 모두 도시로 빠저나가 5,000 정도 밖에 안된단다. 위치는 충청북도 남단에, 보은과 영동의 중간지점으로, 군은 옥천군이지만 영동에 가깝다.

내가 청산에서 산것은 태어나서부터 국민하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13년간이나,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기억은 너무 어려서 전혀없고, 기억에 남아있는것은 학교를 다니든 6년간의 일들이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해 128일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었고, 5학년 때의 해방까지, 국민학교시절의 대부분은 일제하의 소위 "대동아전쟁"시대로, 모든 생활이 궁핍과 통제로 얼룩진 고난의 시대였고, 특히 2차대전 말기에는 일본의 폐전이 가까워지면서, 신사참배, 공출, 근로동원, 징용, 징병, 정신대 등등 별의 고난과 희생이 강요되든 때였다.

한편 우리집안은 청산의 중심부인 지전리의 산밑에 자리잡아, 큰댁 (큰아버님댁) 작은댁(우리집) 나란히 있었고, 청산에서는 가장 알아주는 부자집이고 동네유지의 집안이었다. 특히 큰아버님은 진사급제를 하시었으나 관계에 나가지는 않으시고, 집안에서 책을 보시며 소일하신 선비시면서, 당시 청산의 양반집안으로는 가장 연로하시여 모든사람의 존경을 받으셨고, 우리 아버지는 그때 당시로는 극히 드믈게 미국유학을 하고 오신분으로 ,우리집은 가장 개화된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청산에서 라디오와 축음기 - 오늘 이름으로는 Record Player - 있는집은 우리집 밖에 없었다). 이렇게 온동네에서 존경 받는 집안이면서 두분다 직장생활도 하지않으셨기 때문에, 일제 36년에 한국의 거이 전국민이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나, 우리집만은 창씨를 하지않고 ""씨로 지났어도, 일본경찰이 어쩔수없이 수수방관할수 밖에 없었든, 당당한 집안이었다. (내이름은 일제시대에도 "조오또오링"이었다) 덕분에 하루는 학교에서 일본인 단임선생이 "너는 일본인이냐? 미국인이냐?" 다구쳐 물어서 곤경에 빠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창씨도 안하고, 아버님은 미국유학을하여 친미파로 보여서 이런 질문을 한듯).

국민학교 청산시절에서 제일먼저 기억에 남는것은 역시 제사 때가 아닌가 싶다. 어린 나이에, 진수성찬으로 보이는 제사밥을 먹고 싶어, 눈을 비벼가며 열두시가 넘어서야 지나는 제사에 참석하고 제사밥을 먹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하루종일 뛰어다닌 피로로 어느새 잠이들어 버리고, 제사때 까지 참아서 제사밥을 먹은것은 허구 많은 제삿날에서 (5대조 까지의 내외분이니까 열분의 제사를 지냈고, 평균으로 거이 한달에 한번) 불과 다섯 손가락으로 세일수 있을 정도였지 않았나 싶고, 잠들면 깨워달라고 어머님께 부탁드려도, 곤히 자는 어린애를 깨울수 없어 안깨워주신 날이 훨신 많아, 다음날 아침에 어머님께 투정도 많이 부렸었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음식도 귀해져서, 우리 같이 부자집에서도, 맨밥을 물에 말아 세우젓과 김치만으로도 점심을 맛있게 먹었고, 고기라고는 일주일이나 두주일에 한번쯤 밖에는 구경을 못했으니, 제삿밥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얘기로 부잣집 자린고비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농경시대에 일정한 농지에서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수확할수 있는 양은 한계점이 있었기 때문에, 부자들의 치부는 "근검절약"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니, 돈을 써야 돈이 벌리는 산업시대와 달리, 모든것을 절약하는것이 특히 부자집에서 체질화 되어 있었든것 같은데, 어떤 형님이었든지 몰라도 (듣기는 했으나 기억이 없음) 연필을 사달라고 큰아버님게 말씀드렸드니 "나는 연필한자루로 3년을 썼는데, 너는 벌써 연필을 사달라는냐?" 꾸중하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하기야 큰아버님은 주로 붓글씨를 쓰셨으니 3년이 아니라 5년이라도 쓰셨겠지만, 옛날 부자들의 경제관념이 이렇게 강하였든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였다.

내가 큰댁에 가면 나이가 같아 동번이 언니와도 많이 놀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것은 헌구/경구 어머님이셨다. 큰어머님은 어른이시라 어려웠고, 헌구어머님은 같은 동자돌림 형님부인이고, 아주머니 성품이 워낙 착하시어, 어린 우리를 언제나 따듯하게 대해 주셔서, 스스럼 없이 큰댁 건너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든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계집애들이나 하는 뜨게질도 이 아주머니한테 배웠고, 전구를 꽂아넣고 양말을 꿰매는것도 배웠고…. 그러든 아주머니를 몇십년만에 처음으로, 1975년에 자동차로 미국일주를 하면서, 그때 사시든 Chicago 남쪽의 South Bend 찾아 가서, 정말 반갑게 만나 뵌것이 엇그제 같은데, 이제 별세하셔서 딴세상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서운하기 그지 없는 심정이다.

큰아버님에 대하여는 워낙 어른이시라 별로 얘기해 기억도 없고, 항상 사랑방에만 계셨지 여간해서 안으로는 들어 오시지를 않았기 때문에 큰어머님을 비롯하여 큰댁식구들과도 얘기하시는것을 별로 뵌적이 없는것 같다. 주로 사랑방 마루에서 뒷짐 짖고 왔다 갔다 하시면서 "에잇 고얀놈들" "에잇 고얀놈들" 연발하시든 생각만 나는데 누구를 꾸짖으시는 것인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아마 일본놈들이거나, 동네에서 못되게 굴든 친일파 놈들이었겠지?

반면에 큰어머님은 거이 매일같이 자주 뵈었는데, 걱정이 많으셨든것 같은 인상이 남아있다. 그런 인상이 남았는지는 잘모르겠지만, 착하신 분이 무언가 서글픈 일이 자주 있었든것같다. 아마 동번이 언니가 벙어리로 말을 못하여 속을 많이 끓여 드려서 그랬는지? 항상은 아니지만 우수에 차있는 표정의 큰어머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청산에서 자라는 동안, 큰댁에는 동운이 누나와 동번이 언니 그리고 헌구와 경구 남매 밖에 없었고, 우리집에는 동선이누나, 동현이누나 그리고 내가 있었다. 양가 모두 그위의 아들/딸들은 중학교이상을 다니느라 전부 서울에서 살고 있었고, 성구도 해방이되면서 큰언니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어 병치례를 해야할 때에 청산으로 내려와 우리집에 함께 있었으니까, 성구의 청산생활은 2년정도였었다.

또한가지 기억나는것은, 큰댁 뒤지 (마당 한가운데에 있든 저장고 - 확실치는 않지만 2m x 2m 넓이에 4-5m 높이는 되지 않았었나?) 가을 추수 때에 쌀을 위에서 붓고, 매일 밑에서 꺼내 먹었는데, 쌀이 워낙 많이 들어 가니까, 일년이 지나 헷곡이 나와도 여전히 묵은 해의 쌀이 남아있어, 큰댁에서는 여간해서 헵살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큰댁식구들이 우리집에 헵쌀밥을 먹으러 가끔 왔었든 기억이 난다. 우리집 뒤지도 뒷곁에 큰것이 있었지만, 큰댁것보다는 훨신 작았고, 우리집에서는 어머님이 묵은 쌀이 남아있어도 헵쌀이 나오면 두가지를 섞어서 밥을 짓기도 하고, 헵쌀만으로 밥을 짓기도 하여, 우리는 헵쌀밥을 많이 먹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도 우리 아버님을 닮은것이 많은것 같은데, 그중 하나가 말이 많다는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남매가 말이 많고 목청이 높은 편인데, 작은언니 (동한언니) 친구가 놀러와서 인사를 들이러 가면, 젊은 사람을 붙잡고 하도 계속 얘기를 하시니까,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어른 앞이라 무릅꿇고 앉아서 요새 말로 기합을 한참 받고야 풀려 나오는 곤욕을 치러야 했었다. 그리고 청산에서는 우리집에만 라디오가 있어, 세상소식을 듣기위해 동내 어른들이 저녁을 드신 후에 거이 매일 같이 모여 앉아 요새 같으면 반상회 하듯 했든것 같다. 아버님은 청산 소비조합에 적극 참여하시었든것 같은데, 내가 아주 어릴때 일이라 내기억에는 없고, 한때 경방단(警防團)이라 하여 지금의 소방서와 민방위를 합친것 같은것이 있어서, 경방단장을 한동안 하셨는데, 이것은 창씨 안한 죄로 너무 일본인들의 압력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신것으로 알고있다.

아버님이 어려운 미국유학을 하시어 지질학이라는 인기도 없는 공부를 하고 오셨는지? 살아계신 동안에 여쭈어 보지를 않아 잘 모르겠는데,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것은 생각도 못하실 분이었고, 축산에 흥미가 많으셔서, 집 근처 계장 (양계장을 우리는 계장이라 불렀다) 에서 돼지가 열마리쯤 있었고, 천단위의 닭을 기르셔서, 부란기로 한번에 최고 2,000수의 병아리를 부화시켰었는데, 여기서 옥천군이나 충북의 품평회에서 일등을 하는것이 목표의 하나로 정성을 드리셨었다. 여기서 하루에도 수백개의 계란이 나왔을텐데 우리 밥상에는 그렇게 많이 오른것 같지 않고, 모두 사과궤짝에 넣어 철도편으로 서울로 보내면, 그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든 큰형님이 (동준형님) 매일 같이 서울역에서 찾아다가 판매상들에게 배달해주느라고 큰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취미로 하신 일이라, 너무나 고급사료를 많이 주셔서,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돈벌이" 안되었고, 일년에 365 이상의 달걀을 낳는 기록을 만드는 재미로 하셨다고 한다.

우리집에는 이런 가축외에도 과수원이 밭이 두개, 사과 밭이 두개, 복숭아 밭이 두개가 있었고, 이런 과수원에는 과수외에도 밑에는 수박, 참외, 딸기등을 심었었고, 계장 한 모퉁이에는 포도 밭도 있어, 과일이란 과일은 없는것이 없었다. 덕택에 잘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골르는데는 나도 기술이 대단하였고, 까마귀란 놈이 배나 사과를 쪼아 먹는데, 익은것만 용케 찾아서 쪼아먹고, 썩은 배나 사과가 성한것들 보다 맛있다는것 까지 배워, 과수원에 가면 어짜피 팔지도 못하는것이니까 그런 배나 사과만 골라 먹는 지혜도 터득하였었다.

청산에 살때는 나이도 어렸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농촌이란 그런 곳이려니하고 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청산은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뒤에는 소나무가 들어찬 동산이 있고, 동내 전체가 산으로 둘러 쌓인 넓직하게 트인 분지속에, 한가운데를 금강상류인 청산천이 흐르고 있는데, 깊은곳은 10m 넘고, 얕은데는 어린애들도 마음놓고 들어가 놀수있게 얕았으며, 물은 한없이 맑아 5-6m 깊은 곳에서도 물밑의 모래알이 보였었다. 냇가 양쪽에는 깨끗한 모래사장이 넓게 퍼져 있기도 했고, 바로 옆에 바위가 있어 높지는 않았지만 절벽으로 되어 있는곳도 있었다. 이래서 냇가에서 미역도 감고, 맨발로 모래무지를 잡기도 하고, 철렵을 나가서 냇가에서 모래무지 매운탕도 끌여 먹고…. 수영을 잘하는 애들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낭만적인 고장이었다. 이러든 청산이 근래에 가보니, 그 많고 맑았든 냇물들이 간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더러운 물들만 약간 개천물마냥 흐르고 있는것을 보고, 정말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었다.

한편 집에서 200m 안되는 뒤동산에 오르다 보면, 동산이 시작되는 우리 계장 바로 뒤에, 좌우로 5-6m 앞뒤로 10m 실히 되든것으로 기억되는 큰바위가 있어, 여기서 청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 누나들과 함께 자주 올라가곤 하였었다. 그리고 여기서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깡통에 구멍을 많이 뚫고 길게 철사에 매달아서, 깡통 속에 나무가지를 넣어서 불을 붙여, 뱅뱅 돌리며 불꽃놀이도 했고, 그것으로 근처에 겨울이라 바짝마른 잔디에 불을 붙여 태우는 불꽃놀이도 하다가 화재를 걱정하신 어른들께 꾸중을 듣기도 하였었다. (계장이 바로 옆에 있으므로 불이 그쪽으로 번지거나, 바로 뒤에 소나무에 번저 산불이 날까봐)

대부분 우리가 제일 많이 놀든 곳은 이바위 근처지만, 거기서 다시 동산을 오르면 (100m 정도?) 20m 평방정도의 나무도 없는 편편한 잔디밭이 있었고, 여기서는 청산이 잘 보여 한눈에 들어오는곳이 있었다. 여기는 주로 여름날 저녁에 저녁먹고 본격적인 산보를 하려면 올라가든 곳이었다.

청산서 옥천까지가 km 되었든지는 기억에 없으나 영동보다는 멀었고, 따라서 군은 옥천군이지만 영동이 청산으로 들어가는 길몫이었고, 주로 영동을 통하여 서울로 가는 기차도 탔었다. 영동행 뻐스가 하루에 처음에는 한번 밖에 없었으나,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두번씩 다녔고, 영동-청산 간이 24km이고 반대쪽 방향인 북쪽으로 청산-보은이 역시 24km이며, 영동과 청산의 중간에 위치한 용산이 (우리집안 산소가 모셔져있는 있는) 12km거리에 있어 청산-영동의 중간지점이라고 기억한다. 한식/추석에는 아버님을 따라 용산 산소를 여러번 갔었는데, 뻐스를 타고 간것보다는 30리길을 걸어서 갔다온것이 훨신 많았다. 한번은 큰형님이 돌아가신 후니까 1946 추석이 아닌가 싶은데, 국민학교를 들어갔을 성구와 둘이서 (나는 6학년) 30리길을 걸어서 용산을 다녀오면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 청산에서 보은 쪽으로 4-5km 가면 청성면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 학교에서 이곳에 소풍을 가서, 비좁은 바위틈으로 기어 들어 가나까 넓직한 동굴이 있었는데,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동굴 같았지만, 지금 가보면 하찮은 조그마한 동굴이 아닐까싶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릴 때에 자란 고향에 향수를 많이 느낀다고 하지만, 청산은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웠든, 목장은 없었지만 목가가 절로 흘러나올 평화롭고 한가한 동내였다. 그런 기억속에서 10여년전에 다시 청산을 갔다가 받은 인상은, 문명의 혜택으로 발전한 도시라기 보다는, 현대문명의 파괴속에 희생된 마을의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니든 시절의 생활을 요새 어린이들과 비교해 본다는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우리가 갖이고 놀던 장남감이라는것이, 조금 두툼한 종이를 대략 4cm x 6cm 짤라 그위에 그림이 인쇄되어 있든 딱지 치기 (이것도 나중에는 사기 힘들어 신문지를 접어서 만든 딱지를 썼다), 가는 나무 가지를 길고 짧게 두개 짤라서 만든 치기, 직경 1cm정도의 사기로된 구슬 치기 (이것만은 돈주고 사야했다), 팽이돌리기, 계집애들은 헌겁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속에 곡식 알을 넣어 만든 공기 놀이 ….. 이정도가 고작이었고, 자전거 바퀴의 쇠로된 태를 굴리는 굴렁쇠만 갖일수 있어도 친구들 사이에 큰소리 칠수 있었으며, 겨울에는 빙판에서 썰매타기, 여름에는 냇가에서 미역감기를 많이 했었다. 청산은 너무 작은 시골 농촌이다 보니, 책가게도 없었고, 장남감 가게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읽을수 있는 책은 학교 교과서 밖에 없었다. 이런데도 서울에서 공부하다 방학이면 내려오는 언니들도, 돈이 없어 그랬는지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서울에서 선물한번 사다주는것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어릴 때에 피부병이 있어, 여름 방학만 되면 대전 큰누나 집에 가서 한동안 있으면서, 유성온천에를 매일 가다시피 했었다. 그러다 청산으로 도라올 때가 되면, 큰누나가 만화책을 수십권식 사주어 갖이고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큰소리 치고 빌려주든 생각이 난다.

한편 학교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운동회와 학예회가 있었는데, 내가 제일 싫어 한것이 운동회이고, 제일 좋아 한것이 학예회였다. 워낙 운동 신경이 둔하여 운동회에서 뜀박질을 하면 맡아 놓고 꼴찌를 했으니까….. 그러나 학예회는 내판으로, 연극과 웅변은 단골 메뉴였다. 언제나 연극의 주인공은 내 차례였고, 해마다 웅변은 언제나 대표로 도맡아 한것 같다.

이사건은 학예회는 아니었지만, 한번은 학교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여 대항에 나가게 되었는데, 연습을 한다고 하도 목청을 높여 연습을 하다 보니 목이 쉬어버렸다. 옥천군 웅변대회날은 가까워 지는데 목소리는 안 나오고어머님이 목쉰데 좋다고 매일 생계란을 풀어 식초를 처서 주셨는데, 조금 나아진듯 하다가는 연습을 조금만 하면 목소리가 안나오고….. 그러다 대회날이 되어 단임 선생님과 옥천으로 가서 대회에 참가 하였었다. 내 차례가 되서 웅변을 하는데, 2-3분도 못하고 목소리가 안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슨 뱃장이었는지 입만 벙긋 거리면서 예정된 웅변을 끝 마쳤으니, 지금 생각하니 용감하였든것 같다. 그렇지만 모두의 웅변이 끝나고 시상식을 하는데 내가 3등을 하였다고 이름을 부르느것이 아닌가? 시상하시는 심사위원 선생님 말씀이, 그렇게 목이 쉬어 소리가 안 나오는데도 끝까지 끝낸 열의가 가상하여, 심사위원들이 3등을 주기로 했단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정말 반갑고 감사하게 3등상을 받아 왔는데, 나에게는 1등상 보다도 자랑스럽고 대견한 상이었다.

국민학교 때에 가장 단짝 친구는 도사집 셋째아들 김선영이었다. 집도 가깝고, 선영이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과도 친구 사이시라, 집안간에서도 왕래가 잦았고, 나하고 해마다 한반에서 1 2등을 타투면서 매일 붙어다니며 놀았었다. 그러든 선영이가, 625사변 때에, 좌경 색체가 농후하든 바로 위의 선준형이, 결핵으로 않는 몸으로 928수복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에 북으로 가는데, 착한 선영이가 병든 형을 혼자 보낼수 없으니 자기가 병구완 해야 한다고 함께 따라나섯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이 되어 다시는 만날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떠날 때에는 그때 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간 갔다가 다시 인민군이 남하하여 돌아올수 있을것으로 믿고 떠났었지만…). 이보다 앞서, 선준형위의 맏아들이자 우리 작은형과 아주 친하든 선호형은 일제시대에 학병으로 끌려가, 동남아 전선에서 전사하였고, 위로 아들 삼형제를 두번의 전쟁으로 잃으신 선영이 부모님이야 오죽 슬프셨겠나마는, 나로서도 형제를 잃은것 만큼이나 슬픈 일이었다.

청산에서의 국민학교 생활은 역시 격동기였든 일제말기와 해방직후에 일이 많이 있었다. 중학교도 없고, 학교라야 국민학교 밖에 없으니, 모든 강제동원은 아직 어린 국민학교 학생을 시킬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국민학교 2-3학년 때 부터, 근로봉사라 하여 밭에 가서 잡초제거하기, 논에가서 모심기나 수확기의 벼배기, 겨울에는 보리밭을 밟아주어야 얼지 않는다고 보리밭 밟기, 퇴비증산이라하여 낫들고 들에나가 잡초를 잔득 비어서 학교마당에 쌓아놓기 (썩혀서 거름으로 쓰기위하여), "쇼꽁(松根)호리"라하여 산에가서 이미 뿌리만 남고 죽어있는 소나무 뿌리 파오기 (이것을 가공하면 연료용 기름이 나온다고 했다. 힘드는 일이라 나는 주로 머슴이 가서 캐오면 갖어다 제출하기만 했지만)…등등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가고 이루 세일수도 없는 일들을 많이 하였다. 농촌에서 젊은 청년들이 대부분 징용으로 끌려가서 탄광이나 공장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징병으로 "대일본제국황군 (皇軍=천황폐하의 군대)" "헤이따이(兵隊 = 군인)" 끌려 갔기 때문에, 농촌일을 일손이 택없이 모자랐고, 이것을 겨우 10살근처의 우리 어린애들이 모두 담당한 셈이었다. 이러다 보니 서툰 낫질에 손가락을 베기도하여, 내손가락에는 아직도 낫에 베인 흉터거 남아있다. (이런 근로동원과는 관계가 없지만, 옷에 이가 많은 애들이 많아, 이를잡아 병에 넣어 제출하기, 쥐를잡아 쥐꼬리를 짤라 제출하기등, 별란것들을 갖어오라고 했었다.) 그외에 금속이란 금속은 모두 공출의 대상으로 (무기나 기계 만든다고) 아낙네들의 비녀는 물론 은수저나 놋수저까지도 모두 공출로 갖다 바쳐서 나무 숫갈 나무 젓갈로 밥을 먹어야했었다.

이뿐 아니라 한달에 한번인지 일주일에 한번인지는 비가오든 눈이오든 학교에서 거이 1km거리의 동산 위에 있었든 신사(神社)에가서 신사참배를 해야 했는데, 특히 추운 겨울에는 보통 고생이 아니었고, 아침에 학교에 가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책상과 의자를 전부 뒤로 밀어 놓고 무릅 꿇고 줄지어 앉아서, 소위 천황폐하가 국민에게 내리신 말씀이라는 "조꾸고(勅語)" "교육에관한 조꾸고" 두가지를 외우고 나서 공부를 시작했었다. 칙어란 당시 일본의 가장 유식한 학자들이 써놓은것이라, 얼마나 어려운 문구로 되어 있는지, 우리는 한마디도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암기하여 줄줄 외울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칙어들의 첫머리는 외우고 있고, 이제는 의미도 알수 있지만,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이 이것을 어떻게 안다고 이런 미련한 짓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특히 이런일 들이 청산국민학교에서 유난히 심했든것 아닌가 싶은데,전쟁 말기에, 대부분의 교장이 일본인인 판국에, 청산국민학교 교장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교장 자리를 지키려니까, 철저한 친일파 노릇을 안 할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일본에 아부하는 일들이 많았다.

원래 일본어에는 아침, , 저녁의 시간에 따라 "오하요 고사이마스", "곤니찌와", "곤방와"라는 세가지 인사가 있고, 헤여질 때에는 "사요나라" 인사인데, 우리학교에서에서 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날때나 헤여질때나 "가찌마스 = (전쟁에서)이깁니다" 인사였다. 이 교장선생의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학병이나 정신대 차출에 앞장서서 학부모들을 설득 내지는 협박하러 다녔고, 하루는 조회에서 "일본이 지면 목을 내놓겠다" 장담을 했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온동네에서 학병이나 정신대로 아들 딸들을 바친 부모들이 이집으로 몰려와, "네목 내놔라"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이교장이 어디론가 도망쳐 몇년동안 행방불명이 되었었으나, 여러해 뒤에 대한민국이 후에, 버젓이 충청북도 장학관으로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내가 직접 확인은 안해서 진위는 불명)

이런 일제시대가 막을 내리고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에 끌려갔든 작은언니(동한) 돌아와서, 청산국민학교에 들어가, 학교에있든 일본군가 내지는 일본을 찬양하는 노래들의 레코드판을 한장 한장 하늘에 날리면서 모조리 깨버리든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신작로(新作路)라하여, 지금의 국도같이, 청산에서 가장 넓고, 중심부의 장터를 통과하는 길에서, 국민학교까지 들어가는 양쪽에 서있든 "사꾸라나무=벗꽃나무" 일본 나라꽃이라하여 모조리 베어버리든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작은언니는 지금의 고려대학인 보성전문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끌려가, 쏘련과 만주의 국경선을 지키는 일본군의 군인으로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쏘만국경에서 서울 까지를 석달이나 걸려 걸어서 돌아 왔는데, 다행이 동남아 전선으로 가지를 않아서, 추위에 고생은 무척 많이 하였지만, 도사집 선호처럼 희생되지는 않고 (당시 학병으로 끌려 갔다가 희생된 사람의 대부분은 동남아 전선에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목슴은 건져서 돌아올수 있었다. 그후 청산에 내려와, 청산국민하교 선생을 하다가, 우리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함께 서울로 왔다.

해방후의 일로 잊을수 없는것은 역시 큰형님에 대한 기억이라 하겠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서울공대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 방직과" 재학중에 "박헌영 사건"이라는 항일 운동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면서 석방이되었으나, 형무소에서 얻은 병으로 (결핵이었다고 기억하고, 그당시에는 결핵 치료제가 전혀 없어 불치의 병이었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큰형님과 아주머님 그리고 성구가 청산에 내려와 아랫방에 살고 있었다. 그당시 해방이 되면서 학교에서 교과서도 없어 (한글로 책이 있을수가 없었다), 선생님만 겨우 한권씩 갖이고 가르쳤었는데, 큰형님이 저녁때 마다 이것을 선생님께 빌려 오라고 하여, 저녁 내내 이것을 공책 한권에 베껴주어, 나는 교과서 나마 갖이고 공부를 셈인데, 그글씨가 얼마나 꼼꼼하였든지 인쇄된 책과 거이 다르지 않을 정도였으며, 글씨체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또하나의 기억은, 형님을 낫게할 약도 없고, 그대로 방치할수도 없어, 하도 답답하시니까, 어머님이 하루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는데, 이 무당이 나무가지를 흔들며, 귀신을 쫏는다고, 큰언니 방에 들어 갔고, 힘없이 누어 있든 형님이 무당을 보자마자 벌덕 일어나, 무당의 따귀를 갈기는 바람에, 무당이 기겁을 하고 쫓겨 나는 일이 있었는데, 역시 큰형님도 공과 출신이라, 나만큼이나 미신은 철저히 배격하였든것 같다. 이러든 큰형님이 결국 반년도 못 살다가 돌아가셔서, 어린 성구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상식상을 차려 놓고 상식을 지나든 생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추기 : 한가지 빠트린것은, 해방직후에 한국에는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거이 없어, 아버님이 충청북도의 미군 군정청 고문 (말은 고문이지만 통역에 가까운)으로 계셨는데, 이때에 미군정청에 요새 말로 정치공작을하여 청산중학교(공립) 설립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