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고등학교 시절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반년만에 청주로 올라와,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한것이 1951 9월이었고, 1954 2월에 청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다시 이사올때 까지, 2년반을 청주에서 살았었다. (국민학교 때에, 해방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학년초가 일본식 3월에서 미국식 9월로 바뀌어, 국민학교는 6년반을 다닌셈이고, 그것이 다시 3월로 환원 되면서 고등학교는 2년반 밖에 안다녔다.)

청주에서는 아버님이 청주상업고등학교 영어선생님으로 생전 처음으로 월급쟁이가 되어 교편을 잡고 계셔서, 청주의 북쪽 끝인 내덕동의 청주상업고등학교 뒷마당에 흙벽돌로 방두개짜리 소위 사택이라는것이 여러개 있어서 거기서 생활을 했다. 결국 상업고등학교 구내에서 산 셈이다. 이중 방하나는 남자가 써서, 아버님과 나와 성구가 썼고, 또하나는 어머님과 동선누나와 외할머님이 기거했었다.

동선누나는 바로 청주상업고등학교 앞에있는 사기그릇 만드는회사에 다녀 월급을 받는 직장 생활을 했고, 성구는 나하고 함께 청주중학을 다녔다. 동현누나는 서울에서 연세대학을 다니고 있어, 집에는 없었고, 방학 때만 내려와서 함께 있었다. 외할머님은 처음으로 우리집에서 함께 사셨는데, 그전에는 외삼촌과 사시다가, 외삼촌이 돌아가셔 갈곳이 없어저서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되었었다. 그러나 우리집에 오셨을 때에 이미 중풍이어서, 2년후에 돌아가실 때 까지, 하루종일 누워만 계시고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외할머님의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어머님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었다.

그때 청주에는 작은 아버님이 청주농과대학 학장으로 계셔서, 시내의 도청 근처의 문화동에서 할머님을 모시고 사셨고, 그 중간 쯤의 청주상과대학 근처에 역시 625때문에 서울서 피난오신 사촌 형님이 청주상대에서 교편을 잡으시며 살고 계셨었다.

이렇게 좁은집에서, 마당이라고는 코딱지만한것 밖에 없는데, 하루는 아버님이 도청에 가셔서 신종이라는 미국산 병아리를 50마리를 얻어 오셨다. 축산을 원래 좋아하셔, 닭 기르기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처음에는 이 병아리 50마리가 우리와 함께 방에서 생활을 했고, 조금 자란후에는 뒷마당에 닭장을 만들고 울타리를 처서 뒷마당에서 자랐다. 아마 우리 아버님은 자식들 보다도 병아리에 더 정성을 쏟으셨든것 같았다. 이런 속에서도, 병아리들은 값비싼 며루치를 먹고 자랐고, 그래도 이 병아리들이 커서 알을 낳기 시작한 후에는 그계란이 매일 밥상에 올라 영양보충에 큰역활을 했었다.

그러든 어느날은 또 도청에 가셔서 이번에는 칠면조를 두마리 얻어오셔서 (그때는 한국의 축산을 장려한다고, 미국에서 이런것들을 원조 물자로 받아 농촌에 분배해 줬었다.) 50마리에 칠면조 두마리가 가세했고 (이것이 한국에서 처음 칠면조를 사육한 시초가 아닌가 싶다.), 그후에는 또 양 두마리를 사오셔서 숫자는 작았지만, 청산의 계장을 연상케 했었다. 닭이나 칠면조는 그래도 집안에서나 자라는데, 양은 풀을 뜯어먹게 하느라고 아침에 멀리 풀많은곳에 끌고나가 매어 놓았다가 저녁에는 다시 끌고 와야하는데, 이것이 나와 성구의 역활이었다. 이렇게 밖에 매여 놓았다가, 소나기라도 오는 날에는 양은 비를 맞으면 안된다고, 비맞으며 열심히 뛰어나가 끌고 오기도 많이했다. (학교 안가는 일요일에 밖에 못했지만…) 덕택에 이 두마리의 양에서 양젓을 짜서, 이것도 가족의 영양보충에 큰 역활을 했었다.

이런것들은 아버님의 농사고, 나는 토끼를 여러마리 길러, 앞마당 벽옆에 토끼장이 여러개 있었다. 이것은 내몫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해야할 일이어서, 풀밭에 가서 신선한 풀을 베어다가 먹이고, 물도 갈아 넣어 주어야하고, 할일이 많았다. 이러면서 닭이나 토끼에 대한 공부도 많이 되었고, 덕택에 닭도 많이 잡아봤고, 토끼고기도 많이 먹었는데, 언제나 닭이나 토끼를 도살하는 일은 내 담당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당시에 작은 아버님은 농대 학장차로 군용 Jeep을 개조한 차를 타고 다니셨었는데, 하루는 작은 아버님이 우리집에 오셨을 때에, 운전수를 구어 삶아 운전을 해보았었다. 운전이라고는 처음 해보는것으로, 우선 운전수에게서 뭐가 뭔지 대충 설명을 듣고, 혼자서 차에 앉아 엔진을 걸고 클랏치를 서서히 떼면서 악셀러레이터를 살살 밟고…… 우선 청주상고 운동장에서 시동을 걸고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학교운동장을 벗어나 학교밖 길로 들어서 버렸다. 운전수는 기겁을하고 쫓아오는데, 나혼자 핸들을 잡고 어떡해야 할지 나도 몰라서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속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조건 엔진을 끄면 어쨌든 차는 설것 같아서 얼른 키를 돌려서 엔진을 끄고, 무조건 브레이크를 힘껏 밟아 겨우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다. 자동차에는 상당한 무리가 갔었겠지만, 어쨋든 위기는 모면했고 진땀을 흘린 기억이 난다.

이상은 집에서 있었든 일이고, 학교에서는 별다른일은 없이, 그저 누구나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든 평범한 고교생활이었다고 밖에 할수가 없겠다. 학생들은 이과반과 문과반이있어, 같은 학년에 반은 이과반 2개반에서 수학 물리 화학등 시간이 좀 많았고, 문과반도 두개로 인문계 과목시간이 우리보다 조금 많았었다. 나는 물론 이과반에 있었는데, 공부는 상위권에는 있었지만, 일이등과는 거리가 멀었고, 중학교 3학년 때 유별나게 키가 커저서 고등학교 때 부터는 항상 반에서 제일 키가 컸었기 때문에, 체조나 군사훈련시간에는 도맡아 기준을 해서, 운동장에서 정열을 해서 섰다가 나는 그자리에서 90도 돌기만 하면 키작은 학생들은 한참을 뛰어야 했었다.

한가지 청고에서 보고 배운것은 정말 훌륭한 영어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영어는 명강의로 참으로 잘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는데,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교장으로 승진을 했었다. 그런데 이분이 교장선생님으로는 완전히 낙제점 교장이 되었었다. 결국 사람은 자기의 특기와 분수를 알고 일을 해야지, 한가지 잘한다고 다 잘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을 배웠다. 그대로 영어선생님으로 계속했드라면, 잘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계속 추앙을 받았을텐데 정말 애석한 일이었다.

그때도 종교를 믿지도 않았고 무신론자였지만 관심은 있어, 한반의 신자였든 친구를 따라 교회를 몇번인가 갔었는데, 한번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과학자라는 친구들은 진화론이라는것을 주장하여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하지만, 나는 창경원 원숭이가 사람이 되어 호적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일도 없다" 설교를 하여, 이 무식한 작자가 진화론이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알면서도 무식한 신자들을 속이려고 하는 얘기인지? 정내미가 똑 떨어저 다시는 안갔었다. 이런 작자들 때문에 한국에는 종교를 오해하는 광신자가 많은것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가지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청고가 나와 우리집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역활을 했다는 점이었다. 청고의 한반에 단짝 친구였든 임구혁이가 있었는데, 그 바로 아래 여동생이 지금의 웅구엄마로, 그러나 그 때에는 국민학교 학생이라 고등학교 학생인 내가 그집에 자주 놀러 갔었지만 그런 어린 아이 여동생이 있는지? 눈에조차 띄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어쨋든 인연이 시작된것은 우리가 청주에 가게 되어, 역시 서울에서 내려와 피난생활을 하든 임구혁이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니까, 이것도 625의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그 여동생이 여자로 내눈에 뜨이기 시작한것은 이보다 여러해 후에 서울로 돌아와, 이화여고 상급반이 된 후의 얘기였다.

아버님은 그후에 작은 아버님의 배려로 청주농대(후에 충복대학이 되고, 지금은 종합대학으로 충북대학교가 됐다.)에서도 시간강사로 교편을 잡으셔서, 미국의 오벌린대학에서 전공하신 지질학과 조금은 연관이 있는 정치지리, 경제지리등을 가르치셨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학생이 쌀한가마니를 낑낑대며 울러매고 찾아 왔었다. 학년말 시험을 봤는데, 낙제가 될것 같으니까 봐 주시기를 바라고 뇌물로 갖어온것이었다. 이것을 보신 아버님이 어떻게 화를 내시고 도루 쫓아보내셨는지, 옆에서 보든 우리가 되게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학생은 별수 없이 그 무거운 쌀 가마를 도루 질머지고 돌아갈수 밖에 없었고, 어머님은 뒤에서 그 쌀 한가마니가 아까워서 투덜 투덜 하시든 생각이 난다. 역시 양반 선비 조씨집안의 전통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