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사변

 

625사변이 난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625일 일요일 아침에 무슨일 때문인가 전차종점의 큰길에 나가보니, 뭔가 이상했다. 헌병이 여러명 나와서서 지나가는 군인을 모조리 잡아서 군용트럭에 태워서 미아리고개 넘어의 북쪽으로 계속 보내고 있었다. 뭔가 있나 싶어 집에 와서 라디오를 틀으니까, 북괴가 새벽에 남침을 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 특유의 미국식 액센트의 한국말로, 국군이 용감히 싸와서 격퇴중이니 시민은 걱정말라고 방송하고 있었고…..

이때에 전쟁소식을 알수있는것은 라디오로 들려오는 KBS방송 뿐으로, 그때에는 한국에 방송국이라고는 HLKA KBS 하나뿐이었다. 이래서 25일과 26일은 어수선한 가운데에, KBS 말만 믿을수 밖에 없었고, 그저 38선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나보다, 그래서 일요일을 끼고 휴가를 나왔든 국군장병의 휴가가 전부 취소되고, 일선으로 보내어지고 있나보다 정도로 밖에는 알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 전쟁의 실감이 난것은 27일 저녁 때였다. 방송은 여전히 용감무쌍한 국군 장병이 북괴군을 곳곳에서 격퇴했다고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슈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머리위를 날라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포탄이 10여개 머리위를 날라가고나니, 온식구가 겁에 질릴수 밖에 없었고, 이래서 미아리는 아무래도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라,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위험한 곳이 될테니까, 그때 사직동에 살고 있든 남혁이네 집으로 피하자고, 온식구가 맨손으로 집을 나와 사직동으로 피신을 했었다. 그때 전차나마 다니고 있었든지?, 처음부터 걸어서 갔는지? 잘 기억은 없는데, 그래도 전차가 운행되고 있었지 않았든가 싶다.

이래서 전부 사직동에서 밤을 꼬박 세우고 지났는데, 아침에 신문기자였든 사촌형님인 동건이 형님이 새벽에 일직이 와서 중앙청 국기계양대에 인민공화국 국기가 꽃여 있드라고 했다. 이양반이 중앙청이 가깝기도 했지만, 신문기자라는 직업의식으로 일찍이 나가 보았든것 같았다. 그래서 사직동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돌아올 때에는 전차도 없고, 그 먼거리를 완전히 걸어 올수 밖에 없었다.

거리에 나오니 낯서른 인민군들이 길에 쫙 깔려있었고, 왼팔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곳곳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 오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것은, 종로1가의 화신백화점앞 인도에 국군 병사 하나가 총에 맞아 쓰러저 있었는데, 피를 흘리면서도 아직 죽지는 않은듯, 팔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길가는 사람들이 누구하나 도와줄려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못본듯이 지나가고만 있었다. 정말 불쌍했지만, 나도 모르는척 지나칠수 밖에

625가 처음 시작될 때의 남북한의 전력에는 워낙이나 차이가 컸었다. 원래가 쏘련은 육군이 막강하고, 미국은 공군 해군이 강하여, 쏘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당해낼 무기가 남한에는 없었다. 남한의 육군은 그동안 미국이 준 M1 소총이 주력이었지만, 일본군이 버리고 간 38식 구형소총도 많이 쓰고 있었고, 탱크라고는 아예 없었든것으로 기억한다. 이러니 소총과 수류탄만 갖이고 그 튼튼한 쏘제 탱크를 저지할 능력이 아예 없었고, 공군이라는것은 국민의 성금으로 사들인 건국호 라는것이 딱 10대가 여의도 비행장에 있었는데, 이것은 순전히 훈련용으로, 지금 미국의 비행장에서 많이 볼수있는 개인용 단발 프로펠라 경비행기 비슷한것으로, 아예 쏘제 야크 전투기와는 싸움이 안되는 것이었으므로, 이 건국호는 북괴의 첫공습에 몽땅 박살이 났든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상태에서 남한이 전쟁을 먼저 일으켰다는 북한의 생트집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한 두살 먹은 어린애거나, 머리가 돈 사람이라고 밖에 볼수 없고, 누구의 상식으로도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어쨋든 북괴의 갑작스런 이런 남침으로 공산치하 3개월이 시작되었고, 온국민의 수난기가 시작되어, 정말 많은것을 경험하였다. 그래도 처음에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은, 중공군의 일부로 훈련을 받은 가장 정예부대이기도한 소위 팔로군 출신 병사들이라고 했는데, 정말 점잖은 인민군이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려다가, 인민공화국 돈은 못받겠다고 가게주인이 얘기하니까 순순히 그러냐고 하면서 나가는것도 보았고, 잘 것지 못하는 노인을 부축해주는 인민군도 봤었다.

어쨋든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순간적으로 변한것이 우측통행이었다. 지금까지 사람은 좌측통행을 했는데, 인민공화국이 되면서 우측통행으로 바뀌었고, 그것도 그냥 우축통행이 아니고, 전차길을 가운데놓고, 양쪽인도를 일방통행으로 하는 철저한 우측통행이었다. 한동안은 군인들이 길에 서서 이 우측통행을 강요해서, 바로 옆에를 가는대도 전차길을 두번이나 건너야 했었다.

이렇게 처음에 들어왔든 팔로군 출신 인민군은 비교적 선량한 군인들이었는데, 들리는 얘기로는, 남한을 점령하고 우선은 남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김일성이가 일부러 훈련이 잘된 팔로군 출신들을 보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들이 전선이 남하하면서 서울을 빠저나가고,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은 남한에서 그동안 지하운동을 하든 남로당원(남조선 노동당)들과 민청원(민주청년동맹), 그리고 여자들의 부녀동맹원들을 앞세우고, 별의 별 만행을 다 저질렀다.

그동안 지하운동하면서, 형사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아 왔다가, 자기네 세상이 되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신이 났었겠나? 이런일은 서울보다 시골에서 심하여, 지주나 부자나 저의들 마음에 안드는 사람은 전부부르조아의 잔재"이고, “인민을 착취한 반동분자"이고, 머슴살이를 하든 무식하고 학대받든 계층의인민"들의인민제판"에 수없는 희생물로 즉석에서 사형되는 만행이 계속되었었다. 이렇게 신나게 날뛰든 남노당원들과 민청원들도, 한달이 안되어 거이 대부분이 북에서 내려원 북노당(북조선 노동당) 멤버들에게 자리를 뺏기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의용군에 차출되어, 결국은 낙동강전선에서 대부분이 개죽엄을 당했고, 우리 둘째형님(동한)도 그중의 하나로 희생되었기에, 이런 뒷이야기를 잘 알수 있었다.

이때에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았는지? 아버님은 직장도 안다니셨었고, 청산을 떠난이래 몇년을 놀고 계셨으니까, 아마 청산의 땅들을 팔아서 먹고 살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돈도 바닥이 났었든지, 먹을것이 없어 보리죽을 참 많이 먹었다. 이때에 하도 보리죽을 먹어, 나는 보리라면 아직도 질색이다.

이런 판에 셋째누이(동선)가 장결핵에 걸렸었다. 그당시에 결핵약은 스트렙토 마이신이라는 주사약 뿐이었는데, 이것이 비싸기도 하고 구하기도 힘들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작은아버님이 꿀벌을 많이 기르셔서, 서울에서 팔으려고 우리집에 꿀 20통을 맡겨 놓으신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꿀 20통을 팔아서, 그돈의 90%이상이 이누나 마이신 주사값과, 그래도 이누나만은 환자라고 쌀밥을 따로 해주어, 누나 쌀값으로 들어갔고, 이꿀이 없었든들 아마 십중팔구 누나는 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누나 쌀밥이 되게 부러워 처다만 봤고….

그때에 둘째매부(동순누나 남편)는 외무부 통상국에 과장으로 있어서, 비교적 생활이 괸찮았고, 역시 돈암동 종점의 전차길 맞은편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누나네집에가서 배불리 밥도 얻어 먹었었다. 학교는 문닫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집에서 놀고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여름방학이 되버렸고), 돈좀 벌어 본다고 밤에찹싸알떡"하고 외치면서 찹쌀떡을 받아다가 찹쌀떡 장사도 해보았었다. 이것도 누나네가 많이 사주었고, 배가 고프니까 한두개식 집어먹어, 돈은 못벌었든것 같고, 돈벌이도 안되어 한달도 못하고 집어 치웠다.

이러다가 전선이 낙동강을 사이에두고 교착상태에 빠지고, 인민군의 보급로는 길어지고, 인민군은 미군의 폭격과 낙동강전선에서 자꾸 죽어넘어가고, 소위 의용군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거리에서나 집에서나 젊은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기 시작했고, 이들은 낙동강으로 이동하면서 훈련을 받은것이 고작으로, 낙동강전선에 배치되었으니, 살아남은 사람이 많지 못했다.

하루는 누나네 집에 또 밥을 얻어 먹으러 갔다 오는데, 돈암동 종점의 큰 길을 건너 오려니까 경동고등학교 3학년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오라고 했다. 왼팔에 붉은 완장을 찬 이친구가 왼팔을 거더부치고 보여주는데 뭔가 붉은 사각도장이 팔둑에 크게 찍혀 있었다. 그게 무슨 도장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김일성 수상님의 명령에 따라 의용군에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내 나이는 의용군 갈 나이도 아니었지만, 우리반에서 내 키가 제일 컸고, 요새같이 시민증도 없었으니까, 나이를 증명할 증명서도 없었으니, 못가겠다고 해서 통할것 같지도 않고, 우선은 의심을 안받게 했다가, 나중에 기회봐서 도망을 치는것이 더 현명할것 같기에, 두말도 않고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랬드니 이친구가 더 잡아야겠는지 따라오라고 하드니 돈암교까지가서 동도극장에를 데리고 들어갔다. 극장에서는 그때 석화(石花)라는 쏘련영화를 상영하고 있어서, 덕분에 이 영화를 공으로 구경했지만, 지금은 무슨 영화였는지 한 장면도 기억에 없다. 아마 도망갈 눈치만 보느라고 영화는 제대로 안봤든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그동안 잡은 대여섯명을 대리고 당시에 의용군 신체검사장이었든 돈암국민학교로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렸다. 그래서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숨어 있는데 머리위로 L-19 경비행기 한대가 저공비행을 하며 지나갔다. 그때에는 이미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북괴 비행기는 얼신도 못했고, 전투기나 폭격기의 공습보다는 이 L-19이 더 무서웠었다. 단발 프로펠라 경비행기인 이 L-19이 저공으로 날르면서 정찰을 하여, 인천항 근처에 있는 해군군함에 연락을하면, 인천 외항에서 날라오는 함포사격의 포탄이 정확히 목표물에 떨어젔으니까, 이들이 이것을 더 무서워 했었다. L-19 덕택에 함께가든 일행이 전부 혼비백산하여 허터저 버렸고, 이래서 나의 첫번째 의용군 시련은 쉽게 지나갔으니, 정말 운이 좋았었다. 그때에 그 L-19이 아니었든들, 지금 이렇게 콤퓨터 뚜드리며 옛이야기도 못하고, 낙동강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사라저 버렸을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번 의용군 때문에 혼이 나고 나니까 겁이 나서 그다음부터는 두문불출하고 밖에도 못나가고, 집에 있어도 겁이나서 숨어 살았다. 돈암동 집에는 일제시대에 쌀을 숨기려고 만들었는듯, 대청마루 밑이 지하실 같이 되어 있었고, 출입구는 눈에 잘 안 띠게 쌀가마니가 하나 들랑거릴수 있을 정도로 되어있어, 판때기 하나로 덮여있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낮이고 밤이고 주로 깜깜한 이 지하실에서 살았고, 밥 먹을 때에만 기어 나왔었다. 그러니 그속은 여름이라 다행히 춥지는 않았지만 습기도 많고,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달 가까이를 이런 생활을 하다가, 그동안 아무일도 없기에 다시 방으로 되돌아와 자는데, 하루는 밤 두시가 되어 곤히 잠든 한 밤중인데 대문을 뚜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고함이 들려왔다. 그래서 대문을 열었드니, 민청놈들 몇이서 역시 붉은 완장 둘르고 인민군 한놈과 함께 들이닥처, 집을 삿삿히 뒤지드니, 나보고 의용군에 가야한단다. 하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미처 지하실로 피할 겨를도 없었다.

이래서 한밤중에 가까운 교회 건물로 끌려가서, 아침이 될때까지 김일성장군 찬양하는 연설을 몇시간을 들었다. 그러더니의용군 못갈 사람 손들어라"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손들만큼 용감한 인간이 있을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만장일치로 가결됐읍니다"란다. 이런 미친짓이 빨갱이들의 상투수단이었다. 한번은 넷째누나(동현)가 부녀동맹에 끌려갔었는데, 거기서도 김일성이 찬양 강연을 듣고, 한두마디 질문을 했드니동무 거 너무 잘 알아서 못쓰겠네"하드란다. 빨갱이란것이 이런 놈들이었다.

그러다가 한가지 눈에 띤것이혁명가 유가족"이었다. 원래 혁명을 좋아하는 빨갱이들은 혁명가를 되게 높이 평가하고, 김일성이도 최고 혁명가로 미화하는 녀석들이라, “혁명가 유가족"만은 봐주는것 같았다. 그래서옳다 이거다"하고, 내차례가 되어 의사가어디 아픈데있어?” 하기에 우선없읍니다?라고 대답했드니, “그럼 의용군 나가도 되지?” 하고 물었다. 그래서 배짱 좋게못갑니다"했드니왜 못가?”라고 묻기에우리가 삼형제로 내가 막내인데, 큰형님은 일제시대에 혁명가로 박헌영사건의 항일운동하시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까지 하시고 돌아가셨고, 둘째형님은 의용군 나가셨고, 남은것은 나하나 뿐인데, 나까지 나가면 대가 끊어집니다"했드니, 이친구 눈이 빠지게 나를 처다봤다. 사실 형님들이 그들이 말하는 혁명가 대열에 끼는지는 몰라도, 박헌영이라면 비록 나중에 숙청 되어 죽었지만 이북에서는 거물이었고, 전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이판국에 언제 저의들이 사실확인 조사를 할까 싶어, 당당히 연기를 하였었다. 그래도 내연기가 괜찮았는지, “!!”하지 않겠나. 이래서 첫번째 위기는"이 살려줬고, 두번째 위기는눈치"기지(機智)”로 피해나올수가 있었다.

이래서 두번의 의용군 위기를 피하여 용케도 아직 아렇게 살아 있는데, 정말 아슬아슬하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위기를 모면하며, 미공군의 젵 전투기가 뜨면 집안에 있든 오동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서울 폭격하는 구경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혼도 여러번 났었다. 그때 미공군이 제일 많이 동원한것이 P-51 무스탕 프로펠라식 전투기와, F-86 쎄이버 젵 전투기로, 특히 F-86은 미공군의 초기 젵 전투기였는데, 날개가 동체에 직각으로 달리고, 양쪽 날개 끝에 연료탱크를 달고 다니는, 요새 전투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때에 한국사람들은 처음으로 젯트기를 보았고, 이것을 "호주기"라고 불렀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처가인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랠리아와 혼동이 되어 "호주기"라고 했고, 이대통령의 처가나라에서 사위나라를 도와주려고 보내온 전투기라는 루머가 널리 퍼저있었다.

이렇게 공산치하의 3개월을 지나다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928일에 서울이 수복되었고(928수복), 빨갱이 세상은 일단은 끝이 났었다. 나는 군작전에는 문외한이지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아이젠하워장군의 노르만디 상륙보다도 우수한 작전이었든것 같다. 노르만디 작전은 그넓은 해변가에 그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수많은 군인이 전사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큰 희생도 없이 한반도의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허리를 싹둑 짤라버리는 바람에, 남쪽에 거의 대부분이 몰려있든 인민군을 완전히 고립시켰고, 북쪽에는 별로 싸울 인민군 병력도 얼마 남지 않아, 그다음부터는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니, 노르만디 상륙보다 훨신더 효과적인 작전이 아니었겠나?

그대신 그대가로, 남쪽에 고립된 인민군이 보급도 못받고, 도망갈 곳도 없고, 공산주의 사회는 워낙 철저한 세뇌로 인간을 무장시켜 놓았기 때문에 투항도 못하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속에 숨어, 몇년간을 게릴라 전쟁을 하는 바람에, 이일대 주민들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치하에 있는 사태가 벌어저 양쪽 모두 많은 희생자를 냈고, 이것을 완전 소탕하여 정상을 되찾는데에는 상당히 여러해가 걸렸었다.

어쨋든 이렇게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평온을 되찾았는데, 이것도 3개월밖에 못갔고,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워낙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 명색은 자원한 의용군이라고 했지만, 수없는 중공군이 개미때같이 몰려오면서 북치고 꽹가리치고, 군대인지 농악대인지 분간못하게 시끄러운 군대였다고 하는데, 이런 중공군의 소위인해전술(人海戰術)” 앞에는 수적으로 너무 적은 미군이나 국군도 점점 밀려서 다시 38선 근처까지 밀려와 버렸다.

이때에 맥아더장군과 트르만 미대통령사이에 의견차이가 노출되었는데,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여 중공군이 한반도에 못들어 오게 하자고 했고, 트르만은 한국전의 승리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만 집착하여 이것을 허락하지 않아, 둘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든것 같았다. 이런때에 트르만 대신에 부시가 있었어야 했는데이래서 결국 만주폭격은 실현이 안되었고, 중공군이 역으로 파죽지세로 처내려오고 말았었다.

이미 얼떨결에 피난도 못갔다가 꼼작없이 당했든 첫번째 경험이 있다보니까, 이번에는 안되겠다고, 서울 시민의 대다수가 보따리 싸들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갔고, 우리도 별수없이 이중의 하나가 될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소위일사후퇴 (중공군의 서울점령이 14)”였다.

그래서 둘째매부가 서울서 대전까지 가는 열차편을 주선하여 주었고, 우선은 대전까지 가서 그때까지도 대전에 살고있든 큰누나(동혜)집에 가 있으면, 외무부에 있든 둘째매부가 상황을 봐서 대전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우리식구와 둘째누나네 식구가 함께 서울역에서 대전행 기차를 탔다.

그런데 타고 보니 말이 기차지, 지붕도 없는 화물차에 사람이 빽빽이 타고 있었고, 계절은 엄동설한이라 눈은 펑펑 쏘다지고, 기차는 정거장마다 서서 움직일줄 모르고, 얼어죽지 않은것이 다행이었다. 서울서 대전까지 내기억으로 틀림없이 24시간은 더 걸렸지만, 그래도 얼어죽지 않고 이불 뒤집어 쓰고 용케 대전까지 도착하여, 큰누나집에 가서야 마음을 놓을수가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화물차라도 얻어 타고간 우리는 호강한 셈이고, 그 추운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피난을 했으니 그들의 고생은 얼마니 더했을가?

이렇게 대전 까지와서 큰누나 집에서 열흘쯤 있었는데, 그동안에 어머니와 두누이가 김밥을 만들고, 넷째누이(동현)와 나는 이 김밥을 대전역에 갖이고 가서 김밥장사를 했었다. 그러다가 중공군은 자꾸 내려오고있고, 인민군이 남하할때 같이 또 낙동강 까지 밀리면 큰일일것 같았는데, 마침 큰누이의 시동생이 대전 철도국장으로 있어서, 부산까지 가는 화물차를 마련해 주면서 부산으로 갈려면 가라고 했다.

어쨋든 기회가 있으니 부산까지 가놓고 보자고, 온식구가 짐을 꾸려 대전역으로 갔는데, 그많은 식구가 움직이려니까 짐꾸러미도 많았고, 그중에는 가는 도중에 먹으려고 주먹밥을 짠득 싸넣은것도 있었다. 이래서 나는 화물차 속에서 짐을 받고, 넷째누나는 플렛트홈에서 짐을 실어주고, 이제 짐이 거이다 실렸는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것 아닌가?

식구는 나밖에 탄사람이 없는데, 큰일 났다고 넷째누나는 문옆에 있었으니까 잽사게 올라 탔는데, 역 직원이 옆에 있다가 입환작업 하는것이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그래서 더이상 탈생각을 안했는데, 기차가 그냥 대전역을 떠나버렸고, 이래서 우리 둘은 가족들과 생이별을하게 되고 말았다. 다행이 이번 화물차는 지붕없는 무개차가 아니고 제대로된 화물차였고, 그 여러사람이 먹을 주먹밥을 둘이서만 먹게 생겼으니 배곺을 염려는 없는데, 가족들과 해여젔으니 앞일이 캄캄하였었다.

그러니 어쩔건가? 이제는 되돌아 갈수도 없고…. 별수없이 둘이서 부산을 향해서 떠났고,다행이 겨울이라 여러날이 지나도 주먹밥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냉장고에서 갓 꺼낸것 같이 굳어있고 차거운 주먹밥으로 매끼마다 배를 체우면서 내려갔는데, 이번기차도 정거장마다 서서는 세월아 네월아 하고 떠날 생각도 안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기차가 한반도 동남쪽 구석의 경부선으로 몰리다보니, 정말 요새 주말의 고속도로마냥 기차가 움직일수도 없었나 보다. 그러다가 몇일이 걸려 밀양까지 왔는데, 밀양역에서 미군 MP들이 피란민들은 전부 기차에서 내려 되돌아 가라고 했다. 그러니 여기 까지와서 되돌아 갈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 화물차 속에서 희안한 아이디어가 나와서, 화물차를 안에서 잠궈 버리고, 모든 사람이 찍소리도 못내게 하여, 우리칸에는 사람이 없는것 같이 하기로 했다. 그래서 모두 기침소리고 못내고 쥐죽은듯이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간난애가 울기 시작했다. 이래서 멋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은 문을 열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모두가 되쫏겨 갔는데, 마침 넷째누나가 625사변이 나기 조금전에 체신부 보험관리국에 취직이 되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공무원증을 갖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MP에게 자기는 공무원으로 정부가 전부 부산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자기도 정부 따라 가는중이고, 이애는 내동생으로 같이 갈수밖에 없다고 사정하였드니, 너의들은 가라고 OK를 해주었다. 어쨋든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잘도 빠저나가는 길이 열렸든것으로 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이래서 부산역까지 차겁고 딱딱한 주먹밥만 먹으면서 일주일이 걸려 도착하였지만, 한번도 와보지도 않은 낯선 부산땅에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화물차 안에서 짐을 지키고, 누나가 부산으로 나가 우선 외무부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서울이 이미 중공군에게 함락됬으니, 매부가 아직도 서울에 있을리는 없고, 외무부에 가면 매부소식을 알수 있을것 같아서 외무부를 찾아갔드니, 매부는 이미 부산에 와있는것이 아닌가?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매부는 외무부가 서울을 철수 하면서, 트럭을 하나 빌려 대전으로 내려왔단다. 대전에 와보니 식구가 이산가족이 되버렸는데, 우리 남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찾을 길도 없고, 어쨋든 부산으로 갔으니 부산가서 찾아보자고, 나머지 식구들을 모두 트럭에 태우고 우리보다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역에서 멀지않은 초량에 이미 집을 구해서, 가족들은 그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었다. 결국 이산가족 생활은 다행이도 일주일만에 끝나서, 가족이 다시 모였지만, 이동안에 우리 부모님들은 얼마나 마음을 조리셨을까? 그래도 그정도로 끝났으니 이것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수 밖에역시 나는 운이 좋은가보다.

이래서 우리의 부산 피난생활이 시작되었고, 남혁이네도 부산으로 피난와서 대신동에 살았었다. 처음 부산에 가서는 학교에 갈 생각도 못했고, 집앞의 네거리가 전차길의 Main Street에서 얼마 안되어,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남이하는것을 흉내내어, 우선 목판장사를 시작했다. "목판장사" 1m x 50cm정도의 목판에 담배, , 캔디, 초코레트등을 늘어놓고 파는 소규모 장사였다. 그런데 이것도 서울에서 하든 찹살떡 장사마냥 자꾸 집어먹어서 돈벌이는 못했었다. 배는 고픈데, 눈앞에 맛있는 먹을것만 처다보며 하루종일 서있을려니 안먹고 배기겠나? 한번은 같이 장사하는 친구와 서면에가서 물건을 사왔는데, 그중에 베이콘 깡통이 있었다. 보통의 통조림통의 두배는 긴것이었는데, 서면서 초량까지 걸어 오면서, 이 베이콘 깡통 하나를 뜯어서 둘이서 걸어오며 몽땅 먹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짠 베이콘을 어덯게 생으로 다 먹었는지 신기하지만, 그때는 정말 맛있게 먹었든것 같다.

이래서 이장사도 한달도 못가 집어치우고, 부두노동에 나섰다. 부산항에는 부두가 여러개 나란히 있었는데, 여기에 매일 같이 군수물자를 실어온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고, 이것을 하역하기위하여 많은 일손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언제나 아무나 부두에 가면, 반장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아무나 20명씩 골라 잡아 그날의 반을 형성하고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켰었다. 이런 반들은 크게 "선내반"이라하여 배속에 들어가 짐을 윈치(기중기)에 실어주면, 윈치가 이것을 지상에 내려주고, "육상반"이 이것을 창고 까지 날라다 주면, "창고반"이 이것을 창고에 쌓는것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반이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선내반은 배속에서 일하니까 감독이 소홀하고, 한번 짐을 실어주면 윈치가 이것을 다내려놓고 다시올때 끼지는 쉴수가 있었지만, 그날 어떤 배속에 들어 가느냐에 따라 "먹을것"이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그것이 무어냐?가 결정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을것"이란 모두 배가 고프니까, 제일 좋아한것이 C레이숀을 싣고 들어온 배였다. 이레이숀 한상자 속에는 미군 병사의 일일분 식량으로 깡통이 여섯개가 들어가 있어, 소고기 통조림한개, 닭고기 한게, 콩조린것이 한개, 담배한갑과 껌 그리고 초코렛이 들어있는것이 한개 등등 여섯개가 들어있었는데, 감시의 틈을 타서 숨겨서 들고들어온 면도칼로 레이숀상자를 뜯어서 주로 소고기깡통만 뜯어먹었으니, 소고기 통조림이 없어진 레이숀상자를 받은 병사는 얼마나 화가 났었을까?

어떤때는 재수없게 양파만 싣고온 배속을 들어간 친구들이, 그래도 그것도 음식이라고 생 양파를 먹다가 양키 MP에게 들켰다. 그랫드니 이 MP가 그양파 한상자를 다먹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여, 양파 한상자를 다먹으려니 될노릇이 아니었고, 몇개 먹다가 기권을 하였는데, 그래도 인심좋은 애들이라 따귀 한두게 얻어맏고 풀려나왔다. 또 어떤 친구들은 계란을 먹다가 들켜서, 그상자에 남아있든 계란으로 계란세례를 받기도 하였었다.

이에비하여 육상반은 선택의 여지가 많았었다. 자기네 화물은 무엇이든, 이곳 저곳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레이숀이 3-4m 높이로 쌓여있는곳을 찾기는 쉬웠고, 쌓는 친구들이 아예 이것을 쌓으면서 가운데는 움푹들어가게 쌓아서, 그속에 들어가면 밑에서는 전혀 안보였고, 얼마든지 그속에서 먹고 나올수가 있었다.

이렇게 8시간의 부두노동을 끝내고 (나는 야간반만 했었지만 3교대로 24시간 작업이었다) 나오면서 그날의 임금을 받고 몸검사를 하는곳을 거처 나오면, 그앞에는 숨겨 빼내오는 물건들을 사려고 아주머니들이 수십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설탕을 한두근씩 숨겨나오기도 한다는데 어떻게 숨겨서 몸수색을 통과하는지? 정말 순경 열이 도둑하나 못지킨다고 잘도 들고 나오는것 같았다. 이래서 부두노동은 좀 고달프기는 하지만 실컷 먹고 돈도 벌어와 괜찮은 일이었다.

부산에 피난가서 처음 두어달은 이렇게 학교에도 안가고 지났는데, 우연히 신문에 서울사범학교학생은 부산사범학교에 등록하고 다니라는 공고가 났었다. 그래서 부산사범학교를 찾아가서 등록을 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늘어난 학생수를 감당을 못하여, 마당에다 텐트를 치고, 텐트속에서 공부를 했고, 때가 되니까 졸업장도 주어, 이렇게 부산에서 서울사범학교 병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생활은 고생도 됬지만, 재미도 있었다. 사실 부두노동도 뭐 생활비에 보태겠다는 생각보다는 레이숀 박스 몰래 뜯어서 소고기 실컷먹고 쵸코렛 먹는 재미가 있어 간것이 더 큰이유였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사먹은 오징어 덴뿌라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도 겨우 중3이라, 집안식구 살림에 보태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생각을 더했으니, 아직 철이 덜난 때였다. 내생각에 우리 살림은 넷째누나도 보험관리국을 찾아가 다시 월급을 받아오기는 했지만, 그많은 식구를 먹여 살린것은 역시 둘째매부 였었든것 같다.

이렇게 부산생활을 반년쯤 한후에, 아버지가 청주에서 청주농과대학 학장을 하시던 작은아버지를 만나보시러 청주를 가셨다. 그런데 청주에 가보시니, 옛날 해방직후에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하였었는데, 한국에 영어를 할줄아는 사람이 없어, 군정청 고문으로 계시면서 청산에 청산중학교를 세우셨고 (공립학교), 그때 청산중학교 초대교장을 하시든 분이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었다.

그래서 청주상업고등학교로 아침일직이 찾아가시어 오래만에 반갑게 만나 보셨는데, 이교장이 학교의 조회시간이 됬다고 함께 나가셔서 조회구경이나 하시자고 모시고 나가서는, 갑자기우리학교에 새로오신 영어선생님을 소개합니다"라며 전교학생에게 아버지를 소개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완전히 타의에 의해서 할수없이 교편을 잡기 시작하셨고, 그때부터는 우리도 일정한 수입이 있는 생활이 시작 되었었다. 이교장 양반이 옛날 청산에서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계셔서, 정상적으로 교편을 잡으셔 달라고 해봤자 통할것 같지 않으니까, 완전히 기습작전을 한것이었다.

마침 학교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이래서 우리는 청주로 이사를하여 , 부산의 피난생활을 마감하고, 나는 청주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공대에 입학할때 까지 2년반을 청주에서 살았었다. (2년반이 된것은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학년초가 9월에서 3월로 바뀌는 바람에 반년이 날라가 버렸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625사변의 전부인데, 625사변은 수십만의 인명을 희생시켰고, 수많은 파괴를 초래한 한반도의 비극이었지만, 내생각에 두가지 이익은 만들어 준것 같다. 그첫번째는 전쟁으로 낙동강 까지 밀리고,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다시 밀려오고 하는동안에, 이남에서 지하운동을하든 친공주의자는 모두 이북으로 갔고 (아니 대부분은 의용군으로 낙동강전선으로 보내저 개죽엄을 당했고), 이북에서 공산주의 가 싫었든 사람은 모두 이남으로 내려와, 양쪽이 자연히 깨끗이 청소가 되었고, 그후에는 지하운동 같은것이 거이 사라저 버려서 나라가 안정되었었다는 점이고 (북한도 그랬었을것으로 김일성이가 왕국을 세우기가 무척 편해젔었을테고), 두째는 피난민이 남북으로 왔다갔다 하는동안에 지역문화가 자연히 혼합되어, 지역간의 문화차이가 많이 개선되지 않았나 싶다. 그전에는 서울 사람이 부산을 가면, 말도 잘 못알아 듯고, 피양말이나 함경도 말도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서로의 대화가 쉬워젔고, 서로간에 친구도 많이 생겼으니가, 이것은 625가 갖어다준 이익이라 하겠다. 그정도를 위하여라면, 너무나 큰 댓가를 치렀지만….

이렇게 공산치하에도 있어보았고, 김일성이가 큰 오산을하여 시작한 625참사를 뼈저리게 겪은 우리세대로서는, 공산주의나 전쟁을 못겪어봐서 그런지?, 요사이의 한국국민의 좌경화 색체는 아무리 좋게 봐줄래도 이해할수가 없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무기가 세뇌고, 그들의 지능적인 세뇌공작은 본인도 모르는사이에 물들게 하는것이 그들의 특기이지만, 동족이라는 미명에 속아, 김정일도당의 북한정권과 동족인 북한의 일반 국민과를 구별하지못하고, 자기는 동족을 돕는다고 생각하고 하는짓이 결국은 북한동포에게는 아무 도움도 못주고, 김정일도당의 북한정권 소수의 공산당 패거리들만 도와주고 있다는것을 왜 모르는지? 그러고 일부 소수가 그렇다면 또 모르겠는데 과반수를 넘어 대다수가 그렇다는 여론조사이고 보니, 국민전체가 철이 안들었다고 할수도 없고, 이제는 한국국민이 나에게는 미스테리 국민이 되었고, 공산당의 세뇌기술이 정말 무섭다는것을 다시한 실감하게 된다. 이것이 모두 역적 김대중이라는 미친놈이 노벨상인지 뭔지에 미처서, 시작된 일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