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학교 시절 

 

1947년에 청산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 청산 촌뜨기가 서울에 무슨 중학교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버님이 그러셨는지 형님들이 그랬는지 경기중학교라는 학교에 원서를 내어 입학시험을 보다가 떨어지고, 그때는 후기라는 말도 낯 서렀지만 어쨌든 갈수 있는곳이 서울사범학교 병설중학교라는 곳밖에 없어서 그곳에 들어갔고, 우리 식구는 할아버지 대에서 부터 오래동안 살아온 청산을 떠나, 삼선교 근처의 성북동에 집을 하나 사서 이사를 하였다. 성북동 집을 산것은 아마 성구 외가집이 바로 길 건너였든것으로 보아, 성구 외가인 사돈 양반의 추천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가기 전에는 누이들도 여학교에 다니려니까, 동선누나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녔고, 동현누나는 청주에서 동순누나네 집에서 학교를 다녔었는데, 우리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모든 식구가 한집에 모여, 동한언니는 보성전문에 복학을 했고, 동선누나는 여자중학교를 (그때는 중고교가 한개의 학교였다.) 졸업하고 집에 있었고, 동현누나는 동덕여중에 전학을 하였고, 성구 어머니인 아주머니는 남산국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었고, 성구는 삼선교 근처의 국민학교를 다니고, 아버지는 어떻게 공부를 하셨는지 성북동 집에서 한의원을 열어 한의사로 행세하셨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의사는 면허증도 필요없든 시대였기 때문에 동의보감등 몇개의 한의학 책만 보시고 시작한 한의원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의 서울사범학교 병설중학은 청파동에 있었고, 성북동에서 청파동을 가려면 전차를 타고 종로4가 까지와서, 노량진행 전차로 갈아타고 서울역을 지나 남영동에서 내려, 까플막진 언덕길을 한동안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당시 서울은 해방 직후의 대한민국 정부도 수립되기 전인 미 군정시대로, 서울의 인구도 100만을 넘지 못했지 않았나 싶은데, 교통사정이 한말로 엉망이었다. 서울 시내의 시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전차였지만, 전차가 서울시내를 통털어 14대 밖에 없든 시대라, 전차를 한번 타려면 몇십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외의 보조수단으로는 마차가 있었는데, 말이 끄는 약 10여명이 탈수있는 마차가 서울의 간선도로에서 운행되었지만, 요금이 비싸서 우리같은 중학생은 탈생각도 못 했었다.

이래서 결국은 삼선교에서 청파동까지 그 먼길을 거이 대부분을 걸어서 통학을 했었다. 그 거리로 보아 학교까지 가는데 최소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은 걸리지 않았든가 싶지만, 그때의 중학생이 팔둑시계 하나 갖인 학생이 없었으니까, 몇시인줄도 모르고 무조건 걸었었다. 그때 터득한 최선의 방법이 좀 빨리 것는 어른 뒤에 바짝 딸아 붙어, 그 어른의 속도에 맞추어 딸아가는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것이었다. 마치 요새 차운전을 하면서, 고속도로에서 빨리가는 차 뒤를 넉넉히 간격을 띄우고 졸졸 딸아가는것이 교통순경에게 안걸리고 가장 빨리가는 방법인것과 비슷하다. (과속으로 걸리면 앞의차가 먼저 걸릴테니까…)

이렇게 것는것도 봄 가을은 그래도 괸찮았지만, 요새보다도 훨신 추어, 한강이 두껍게 얼어붙는 혹한속에서 겨울에 이 먼거리를 것거나, 한 여름 더위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것는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별로 지각도 안하고 잘 다녔든것 같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을 뿐이지만, 청파동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길이 빙판이 되어있어, 거이 꼭대기 까지 애써 걸어 올라갔다가 그대로 미끄러저 맨 아래까지 미끄러저 내려와서 다시 기어올라 가야 했었다. 심한 날은 이짓을 서너번 해야 겨우 올라갈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린 중학교 1학년생이 그래도 결석 이나 지각 별로 안하고 용케 다닌것 같다.

이렇게 교통이 형편 없다 보니, 그때는 트럭 집어타기가 많았다. 지나가는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만 가면 빨리 쫓아가서 우선 책가방부터 트럭에 던지고 뒤에서 올라 타는것이었다. 그러다 내가 가는 방향과 다른쪽으로 가면 뛰어 내려야 하는데, 달리는 차에 뛰어 타는것 보다 뛰어 내리는것이 더 위함한 짓이었다. 달리는 트럭에 뛰어 타고 뛰어 내리는 것이니까, 우선 재빨라야하지만 요새같으면 위험하다고 교통순경에게 혼구녕이 나겠지만, 그때는 당연한 짓으로 대부분의 학생이 이짓을 잘했고, 그때는 트럭의 속도가 워낙 느려서 가능했든것 같다. 한번은 혜화동 로타리에서 비가온 다음날 이짓을 하다가 미끄러저, 트럭을 타지도 못하고 갈바닥에 딩굴어, 교복이 모두 진흙 투성이가 되었고, 결국 학교도 못가고 도로 집으로 왔든 생각이 난다.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통학을 했었다.

1학년을 청파동으로 통학을 했는데, 2학년이 되면서 서울사범학교가 왕십리로 이사를 했고, 우리도 성북동에서 돈암동으로 더 큰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성북동집은 일년 남짓 밖에 안 살았지만, 방이 세개밖에 없는데서 그 많은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돈암동에 가서는 방수가 갑자기 여섯개나 되어 넉넉히 살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한의원도 안하시고, 계속 무직자로 청산에 있든 농토를 팔아 생활을 했든것으로 기억한다. 이사간 돈암동 집은 전차 종점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는데, 바로 옆집이 당시 대한민국 첫정부가 수립되어 경무국장을(지금의 경찰청장) 지나든 조병옥박사네 집이었고, 앞에는 가게방이 붙어 있어 주로 식료품과 과자류 같은것을 파는, 지금으로 말하면 잡화상 같은 구멍가게 장사를 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를 보는것도 내몫이었다.

이렇게 2학년이되고, 돈암동으로 이사를 간후에 무었 때문이었는지? 잘 기억이 없는데, 몸이 아프다고 학교를 일년을 쉬었다. 아마 학교가기가 싫어서 그랬었는지도 모르지만, 뭔가 병이라고 일년 휴학을 했는데, 요새 부모 같으면 어림도 없을 얘기겠지만, 그때의 부모는 자식교육에 그렇 큰 정성도 안들였고, 크게 관심도 없었든듯, 어쨌든 평생에 단 한번도 공부하라 소리 들어본일 없고, 휴학을 하겠다니까 하라고 쉽게 허락했든것 같다. 이래서 일년 동안을 가게나 보면서 빈둥 빈둥 보내고 일년후에 다시 복학해서 학교를 가기 시작했다.

돈암동에서 왕십리의 통학도 거리는 조금 가까워젔지만, 여전히 먼 거리여서 한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동대문에서 광장리까지 가는 소위 기동차라는것이 있어, 그것을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기동차를 타려면 신설동 까지 산을 넘어가서, 다시 동대문까지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예 기동차길을 따라 학교까지 걸어간 날이 훨신 더 많았다. 다행히 왕십리 학교를 가려면 언덕길은 없어, 겨울에 미끄러저 내리는 고난은 안겪게 되었었다.

하필 다닌 학교가 국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다 보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예능 체육 교육이 강하여, 미술 음악 체조 시간이 보통 딴 중학교 보다 많았고, 특히 미술은 훗날 전국미술전의 심사위원 까지한 유경채선생이었는데, 조그만 도화지는 못쓰게 하고, 화가들이나 쓰는 큰 종이를 캠버스에 올려놓고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했었다. 이 유선생님은 예술가 특유하게 성격도 괴팍하여, 한번은 단임한 반의 학생이 무언가 잘못했다고 얼마나 심하게 머리를 때렸는지 이 아이가 잠깐 머리가 돌아서, 교장선생님방에 지프라기를 들고 들어가서, "교장선생님 귀신 보세요 귀신 보세요?"하는 바람에 교장 선생님이 기겁을 한일도 있었다. 마침 그아이의 부모가 학교의 사친회장이라 학교가 한번 발칵 뒤집혔었으나, 잠간 그러다 회복되어서 큰일은 없었다.

지금도 기억 나는것은 미술시간에 비너스 석고를 놓고 비너스상을 그리는데, 내 딴에는 열심히 그린다고 그렸는데 유선생님이 옆에 오시드니, "야 이것이 비너스냐? 유관순이 영화 간판이지."하며 핀잔을 주고, 애써 그린 종이를 박박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라고 해서, 챙피를 톡톡이 당한일이 있었는데, 내 미술감각이 고작 그뿐인데야 어쩌라는것인지? 또 그렸어도 역시 유관순이 간판이 되버린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렇게 중학교를 다니다 3학년이 되면서 625사변이 터젔고, 결국은 부산으로 피난온 서울사범학교 병설중학을, 부산사범학교 캠퍼스의 천막교사에서 졸업하여, 불과 3년의 중학교 과정을 전학도 안했는데 세군데로 다니며 졸업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