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들어간 서울공대

 

나의 서울공대 입학은 단순한 실수의 결과였다.

원래 어릴때 부터의 나의 꿈은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것이었고, 아인슈타인과 에디슨이 가장 동경한 인물이었으며,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에 남아 연구생활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희망은 국민학교 때부터 시작되어, 국민학교에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중학교 때에는 공과대학을 간다고 결심하게 되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그 방향이 떠 뚜렸해저 무선통신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이 서있었다. (그 당시에는 전자공학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전자분야는 통신공학이 전부인것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인이 축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나를 농과대학을 보내고 싶어하셔서, 가끔 이문제로 부자지간에 언쟁도 했었다. 그러다가 막상 대학입학원서를 쓰게되자 둘사이에 격열한 최종담판의 언쟁이 시작되어, 서로 목소리가 높아젔고, 나는 서울공대 통신공학과에 가겠다, 아버지는 농과대학을 가라는 싸움으로 진전하였는데, 결국 아버지가 한발 물러스셔서, 공과대학 까지는 승인을 하셨지만, 통신공학과는 안되고 전기공학과를 가라는 말씀이었다.

아버지 말씀은, 그당시에는 통신공학과를 졸업해서는 갈곳이 체신부 전화국이나 KBS 방송국 밖에 없는데, 그런 공무원 생활보다는 좀더 범위가 넓은 전기공학과를 가라는 말씀이어서, 그말씀도 당연한 말이기는 했지만, 전자공학(지금 이름으로는)에만 관심이 컸든 나로서는 양보할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무슨과는 고사하고 무슨 대학에 가야할지 조차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유독 나만은 이렇게 주관이 뚜렷하여, 비슷한 전기공학과 전자공학을 놓고 아버지와 격렬한 싸움까지 했으니, 처음부터 색다른 인간이었든것 같다.

결국 화가나신 아버지가 "너 이놈 맘대로해라. 정 통신공학과를 가겠다면 학비를 안대주겠다"고 협박을 하시는 바람에 결국은 내가 질수밖에 없었지만, 통신공학에 대한 나의 미련은 버릴수가 없었다. 그당시, 서울공대만 유일하게 전기공학과와 통신공학과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고, 나머지 대학들은 미국에서도 전기공학과로 입학하여 3학년이 되면서 "전기전공" "통신전공"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울공대에 있었다. 서울공대는 이런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선배가 많아 학교에 남기가 어려울것 같았고, 마침 인하공대가 설립되어 1기생을 모집하였는데, 거기는 전기공학과 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1기생이라 선배도 없을테고, 하와이 교포가 설립한 학교라 혹시 미국 유학의 기회도 있을런지 모른다는 계산으로, 서울공대를 포기하고 인하공대에 원서를 냈었다.

그러면서, 그당시 연세대가 우수학생에게는 필기시험 면제를 해주고 있어서, 결국은 필기시험 면제를 받아도, 같은 전기시험일이라 인하공대와 구두시문의 날이 겹쳐 두대학 시험을 함께 볼수 없을것이 뻔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원서를 냈고, 후기학교에는 가기가 싫어, 어릴때부터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것도 관심이 많아, 특기로 전기보다 먼저 시험을 보는 항공대학 조종과에도 원서를 냈었다. (고등하교 2학년 말에 공군사관학교가 고등학교 2년수료자에게도 자격을 주어, 공군사관학교 시험을 본일도 있었는데, 결국은 시험에 떨어저 못갔든 일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원서를 모두 모아 서울 가서 원서접수를 일괄 해주신 선생님이 인하공대 마감날에 접수시켰다는 접수증번호가 180명 모집정원에 훨신 미달하는 100번도 안되는 번호였다. 12년간 공부해서 정원 미달 학교에 들어가는것도 어굴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교부가 국가고시에 문제가 있었다고, 거기에 합격해야만 대학 입학자격을 주는 국가고시를 무효화하고, 입학원서를 다시 접수하게 했다. 잘됬다고 다시 서울공대에도 원서를 냈다. 그러나 시험날이 가까워 청주에서 올라와 응시생 집합일에 인하공대에 갔드니, 정원 미달은 아니어서, 그대로 인하공대 시험을 보기로 했다. 서울공대도 같은날 응시생 집합이 있어서, 함께 서울공대에 원서를 낸 사촌인 동익이에게 가서 수험표를 받아 달라고 해서, 일단 수험표는 받았었다.

이렇게 4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제일 먼저 시험을 본 항공대학은 합격을 해서, 우선 최후의 선택이었지만 갈곳은 확보해 놓았고 (이때 항공대학에 갔드라면 KAL 기장을 했겠지.), 연세대에서 필기시험 면제는 받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구두시문 날자가 겹처 포기할수 밖에 없어, 결국은 인하공대와 서울공대만 남게 되었었다.

시험날 가회동에 있는 사촌인 동익이네 집에서 시험장으로 향했는데, 그때당시의 서울의 교통이 말이 아니었다, 온서울에 전차가 딱 14대가 운영되었었다고 기억하고, 지금의 한전의 일부인 경전(경성전기)이 미제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다니든 경전뻐스가 있었으나 이것도 대수가 얼마 안되었다. 가회동서 재동 네거리까지 걸어 나와서 혜화동행 경전 뻐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뻐스는 안오고.... 일직이 집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몸은 달고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 있는 인하공대가 수험생의 편의를 위하여 돈암교의 경동고등하교에서 시험을 보았었다) 가까스로 뻐스가 와서 집어타고 혜화동에서 내리니까 바로 앞에 돈암동행 전차가 서있지 않은가? 왠 떡이냐고 얼른 집어 탔드니, 급행이라고 돈암교를 서지않고 돈암동 종점에 내려놓았다. 인하공대 시험은 8시부터인데, 시계를보니 8 10분전. 돈암동에서 돈암교까지 열심히 뛰었다. 연상 시계를 보면서 뛰어서 시험장에 도착하니 8 10. 10분 지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것인지 운동장에 많은 수험생이 있지않은가? 당시 유명했든 Korean Time으로 입학시험도 늦어지나 싶어서 약간 마음이 놓였는데, 청고 동창을 하나 만났다. 그런데 그친구는 문과 출신으로 공대 시험을 칠 친구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는 고려대 시험이 거기에서 있어 고려대 시험을 보러왔단다. 그러니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이 고려대 수험생인지 인하공대 수험생인지 알수가 없게되었다. 부지런히 교실을 있는데로 뒤졌는데 시험보는 교실이 없다. 그럭저럭 시간은 830.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인하공대를 포기하고, 다행이 9시부터 한시간 늦게 멀지도 않은 용두동의 서울사대가 시험장인 서울공대 시험장으로 향했다. 있는 돈 톡톡 털어서 그 비싸든 택시를 잡아타고 용두동에를 가서, 그때 함께 서울공대에 응시한 동익이를 만났다. 응시장이 어딘지 대충 얘기를 듣고 기다려도, 여기도 9시가 넘었는데 응시생이 교실에 들어가는 기색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용변이나 하고 들어가자고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면서 다시 시계를 자세히 보니... 오호라 통재라! 그때가 915분이 아니라 815분이 아닌가? 너무나 조급한 마음에 분침만 보다가 한시간을 잘못 읽었다는것을 그재야 깨달았지만 어쩌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도 내운명이고 내팔자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들었다. 이래서 그대로 서울공대 시험을 치렀는데, 다행이 필수/선택과목들이 똑 같아 수험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성격이 얼마나 조급한지? 이제 후회는 안되고 오히려 잘된것 같지만 기막힌 사건이고, 내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후부터는 시계를 보면 꼭 두번 세번 보아야 마음이 놓이는 습관이 생겨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