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에서의 5년반 (1)

삼성에 입사하자 마자 겪었든 유럽 여행 이야기는 앞서 얘기 했지만, 이렇게 하여 나의 삼성 생활이 시작 되었는데, 때의 삼성반도체는 기흥에 메모리제품 공장이 있어, 전체 매출의 80%이상이 기흥공장에서 이루어젔지만, 실제의 시작은 부천공장의 비메모리 제품 공장이었고, 부천공장의 시작은, 나와 함께 옛날에 아마추어무선연맹의 창립 멤버였고,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일년 선배였든 강기동박사가 세운 한국반도체가 전신이었다. 강기동박사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길을 떠나,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모토롤라에 입사하여 여러해 그곳에서 근무를 하다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어 귀국하여, 한국반도체를 세워 몇년 경영을 했으나 사업에 실패한것을, 삼성이 인수하여 삼성반도체를 시작한것이 반도체 사업의 시작이었다.

반도체 제조공정은 “Wafer Fabrication (통상 Wafer Fab. 한다.)”이라 하여, 99.9999% (이것을 six nine이라함) 얇은 순수한 규소(Silicon) 원판에 사진 현상과 같은 과정을 거처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이 제일 첫번제 과정으로, 이것이 진짜 반도체 기술이고, 우리가 쎄미코어, KMI에서 훨신 일찍부터 시작했든것은 그다음의조립" 공정으로 Wafer Fab에서 한장의 원판(Wafer) 수없이 만들어진 개개의 반도체를 (이것을 Chip이라고하여, Wafer 크기와 Chip 크기에 따라 수백개에서 수천개가 한장의 Wafer에서 만들어진다.) 짤라서 분리 시켜, Package 넣어 사용 할수있는 형태로 만드는 과정으로, 아무리 어렵다 하여도 Wafer Fab 비해서는 십분의 일도 안되게 쉬운 과정이다. 그리고 세번째 과정이 이를 시험하는테스트" 과정으로, 워낙 많은 트랜지스터가 하나 속에 들어가 있어 (AMI 만들던 초기 제품은 수백개 정도. 오늘의 메모리는 수억개) 이들의 성능을 전부 시험하여 양품인지 불량품인지를 가려내는 테스트 공정도, 상당히 높은 기술로 개발 되고 한대에 백만불 가까이하는 비싼 기계를 사용해야 한다.

손톱 정도의 면적인 한개의 칩속에 수천만 수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쑤셔 넣으려니까, 이들 상오간을 연결하는 전선의 폭은 nano meter (십억분의 1m) 가까운 선폭으로 (이것을 nano Technology 한다.), 일반인들의 머리속에서는 상상도 못할 미세폭이고, 따라서 일반 현미경으로는 보이지도 않아 전자현미경으로 보아야 보일 정도의 선폭이다. 이런 알미늄 전선이 옆의 선과 단락(short)하지 말아야 하니까, 먼지도 nano meter 이상의 먼지가 앉으면 안되고, 이래서 반도체 공장 내에서 일하는 사람은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일한다. 담배를 피우고 10 이상은 최소한 지난 뒤에 양치질을 하고 들어가야지, 안그러면 입김에서 담배 연기의 미립자가 나와 제품을 망가 뜨리는 판이라면 약간 짐작이 갈런지 모르겠다. 이래서 반도체 산업, 특히 Wafer Fab. 공장은 언제나 먼지와의 싸움이고, 공장을 휴가 때에 문을 닫아도 에어콘은 계속 돌려, 공기를 쟁화시키고 제품이 항상 24-25도의 일정 온도 내에서 보관되도록 하여야한다. 사고로 에어콘이 한번 정지 되면, 공장 안의 공기를 다시 제품을 만들수 있게 깨끗하게 하는데에 3-4일이 걸린다.

이정도면 이글을 읽는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협박이 되지 않았나 싶지만, 이것은 협박도 공갈도 아닌 엄연한 사실이고, 반도체 사업이란 이만큼 어렵고 고도의 기술과 세밀한 주의가 필요한 사업이다. 그래서 내가 사원 교육을 때에 항상 강조한 말중의 하나가한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적당히 대범하게 사는 사람은 사표를 내라.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일도 따지고 경시 안하는 째째한 사람만이 필요하다.”였다. 이래서 나도 사소한것도 경시 안하고 따지는 째째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렇게 삼성반도체에 처음 출근하여 공장안을 한바퀴 안내 받아 돌아 다니다 보니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공장의 규모가 내가 어디에서 일해 본곳 보다도 엄청나게 크고, 인력도 만명이 훨신 넘는 식구였다. 새로 품질 담당 상무가 왔다고, 가는곳 마다 부장이 과장 계장을 데리고와서 인사를 하는데, 완저히 군대식이었다. 나는 무심코 주어진 서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차려 경례" 라고 고함을 질러, 정말 기절초풍을 할번했다. 얼굴을 들어보니 부장이 과장 계장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하는것이었다. 내가 앉으라고 하고, 담배를 피어 물면서, 함께 피우라고 했드니, 이번에는 친구들이 놀랄판이었다. 그런 상무를 본일이 없었나 보다. 그래서 매번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꽤나 노력을 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쉽지 않았었지만, 몇달이 지난후에는 저의들이 먼저 담배를 꺼내서 피울 정도로 친숙해질수 있었다.

한편 식구들은 애들이 전부 대학을 다니고 있어, 웅구는 Cal-Poly 있는 Silicon Valley L.A. 중간의 태평양 바닷가에 있는, San Luis Obispo라는곳에 있었고, 충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 사원의 신분으로 비정규 사원으로 Hewlett Packard 다니면서, HP 전액 학비를 대주어 University of Santa Clara 다니느라 이곳의 학교 근처에 있었고, 중구는 UCLA 있는 L.A. Hollywood 살고 있어, 모두 이미 집을 나가 있었으므로, 살던 집을 팔고 1987 1 중순에 내외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삼성이 제공해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에서 2-3 있다가, 삼성이 서초동에 미국에서 대려온 임원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은 서초빌라로 1990년에 이사를하여, 미국으로 되돌아온 1996년까지 거기서 살았었다.

삼성반도체의 부천공장은 위에서 설명한것 같이 시작 되었으나, DRAM (디램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중심으로 시작된 기흥공장은, 내가 입사하기 수년전에 시작된 실질적으로 거이 완전히 별개의 사업으로, 이병철회장이 엄청난 위험을 각오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려 실현 되었고, 미국의 Silicon Valley SSI (Samsung Semiconductor Inc.) 세우고, 이일복 박사 같은 한국인 반도체 전문 박사들을 대량 채용하여, 일부는 미국서 최신 반도체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게 하고, 일부는 기흥공장으로 대거 영입하여, 기흥공장의 설계조직인 연구소는 미국서 박사들이 임원으로 자리를 모두 차지했었고, 국내 대학 출신 박사들이 다수 밑에서 일했었다. 삼성전자는 원래가 수원에 있는 가전부문이 핵심기관으로, 가전기술은 일본 산요에서 대부분 들여왔고, 이병철회장이 일어에 능숙하여 일년의 1/3 일본서 보냈다 하는데, 이러다 보니까, 친일적 사상이 농후한 회사였으나, 반도체만은 미국에서 부터 도입된 기술이다 보니 친미적 분위기가 농후한 회사였다. 이래서 수원공장에서는 대부분 일어는 능숙하나 영어를하는 사원이 거이 없었든 반면에, 기흥공장은 일어 보다 영어를 구사하는 사원이 훨신 많았다.

너무 서론이 길어젔는데, 이렇게 삼성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일하든 중소기업의 미국 회사와는 너무 달라, 처음 한두달 동안은 회사를 이해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보냈다. 동안에 여러가지 과제들을 찾아 냈는데, 우선 급한것은 미국의 유명 메이커들이 자주 찾아 오는데, 때마다 내놓을 데이타가 제대로 없었다. 없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고, 있기는 많이 있는데, 전부 조각 조각으로 여러 사람의 책상 서랍에 들어있어, 전부를 모아 정리된것이 없었다. 이래서 고객의 방문만 있다 하면, 몇일을 11 12시에 퇴근하면서 주어 맞추고 프레젠테이숀 자료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도 워낙 품질이 나쁘다 보니까, 데이타를 사실 그대로 고객에게 보여 줄수가 없어, 고객마다 다르게 약간식 조정하여 프레젠테이숀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서로 앞뒤가 안맞는 경우가 많아서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것이 거짓말을 만들고…. 없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래서 우선 사실을 사실데로 보여 주는 정신 상태의 변화 부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 품질보증부와 영업사원을 상대로 세뇌 작업 부터 시작하였다. “회사의 최대 자산은 고객의 신뢰이다. 믿지 못할 회사로부터는 아무도 물건을 산다. 거짓은 결국 거짓을 낳고, 그것은 거짓을 낳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들통이 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일단 신뢰가 실추되면, 회사는 끝장이다. 눈앞의 장사를 하다가 일년도 안가 회사를 닫겠다면 몰라도, 10 20 장사를 하려면, 오늘의 매출에 약간의 손상이 와도 신뢰 구축이 최급선무다." 이것은 내가 쎄미코어에서 영업을 하면서 실제로 경험을 하여 실감한 것이므로, 경험담을 겼드려 비교적 쉽게 그들을 설득할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처 몇달이 걸려 실제 데이타들을 모두 모아서, 어떤 고객이 와도 보여 줄수있는 사실 그데로의 데이타를 프레젠테이숀 형식으로 정리하여 작성할수 있었고, 그후부터는 어떤 고객이 언제 불시에 찾아와도, 아무 추가 준비 없이 프레젠테이숀을 할수가 있게 되었었다. 그뿐 아니라 데이타들은 새로운 데이타가 나올 마다, 고객 방문과는 괸계 없이 항상 update하였기 때문에, 고객 방문 마다 수선 떠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강조하든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능율적으로 일하는 사람"과의 차이임을 그들에게 보여줄수 있었다.

다음의 장기개선 프로젝트로는 우선작업지도서(작업표준)” 있었다. 이것은 작업자에게 기계는 어떻게 setting하고, 작업은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하라는 지침서인데, 모두 적당이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쓰여 젔고, 나마도 문제가 있을 때마다 Engineer 구두 지시로 바꿔 버릇하여, 마치 옛날 금성사의 도면 같이, 실제와는 동떨어진것이 많았고, 한말로 개판이었다. 이래서야 대량 생산의 특징인 균일제품 균일품질이 나올수가 없었다. 공장을 자동기계화하면, 생산량도 늘어나지만 그보다도 기계는 변화가 없이 미련하게도 매번 똑같은 동작을 하기 때문에 균일한 제품이 나오는데,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여 동작을 할때마다 약간씩은 다른 동작을 하기 때문에, 작업표준을 통해서 오차를 최소화시켜야 하는데, 미국회사에서나 일본회사에서는 표준사항인 이것이 삼성에서는 전혀 안되어 있었다. 이래서 우선 품질개선 3개년 개획을 만들고,

첫해는품질개념"작업지도서" 대한 개몽 세뇌의

둘째해는작업지도서" 충실하게 만드는해

셋째해는작업지도서" 그대로 지키게 만드는

정하고, 인사부에 인력 보충을 요구하여, “품질기획과"라는것을 신설하였다. 처음에 5-6명으로 시작하였는데, 과장 외의 전원을 Line Auditor 직접 훈련 시켜, “작업지도서" 쓰는 방법 부터 훈련시켰다. 그런데 삼성 사원들은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라, 그정도는 1년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전환이란 그렇게 쉬운것이 아니니 1년내에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만, 두고 보자고 했는데, 삼년이 지나서도 내가 목표한것의 80%수준이나 달성했을까? 그나마도 내가 표준작업을 수없이 경험하여 절대로 필요 불가결의 요소라는 신념이 강했고, 고집이 쎄서 중도 하차 안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꾸준하게 추진했으니까 그나마도 됐지, 삼년 계획을 변함 없이 추진한다는 일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특히 삼성은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하여,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는 강한 거부감이 있었고, 공장장부터그것은 망한 미국 회사에서나 하지 한국에서는 불필요하다" 판이었다. (당시는 일본경제가 피크에 달하여, 특히 삼성 같이 친일적인 회사에서는, 일본에게 당하여 고전중인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경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래서 내가 활용한것이 매주 한번씩 공장에서 열렸든품질회의" 연구소에서 한달에 한두번식 열렸든개발회의", 그리고 내가 수시로 소집한 부과장 간담회였다. (부과장 간담회를 부서를 돌려가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삼성에 있는동안 계속했으니가, 몇백번은 했다.) 품질회의와 개발회의에서는 주로 간단한 Comment 생산위주의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하면서 사고의 전환을 유도했고, 부과장 간담회의에서는, 많이 하는데는 자신이 있으니까, 길게 설교도하고 강의도하고 의견도 듣고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꿔 나갔다. 이때에 내가 만들어 내어 자주 인용한 말이품질은 손끝으로 만드는것이 아니고, 머리로 만든다" 말이었다.

이래서 처음에는 겉으로는 안나타내면서도 부정적이었든 공장장이하 전임원과 간부들이 서서히 머리가 바뀌면서조상무 말이 옳구나. 표준작업을 해야겠다" 생각이 들게끔 하는데만 거이 일년이 걸렸다. 이것 뿐만이 아니지만, 삼성에서 내가 일하는데에 크게 도움이 된것은장유유서" 강한 유교사상으로, 삼성전자 내에는 나보다 서울공대 4-5 선배인 강진구회장 외에는, 사장이하 모든 임원이 나보다 나이가 5 10 아래여서, 속으로는 어떻게들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도 겉으로는 나에게 정면 반발은 안하고, 따라오는 시늉이라도 하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결국은 나에게 동감하게 된면도 있었다고 생각되고. 특히 연구소에는 미국에서 박사님들이 많아, 이들은 미국식 제도에 익숙하여 처음부터 나에게 협조적이었든것이 도움이 되었었다.

한편 삼성에 처음 입사하였드니, 사장이 매일 저녁 7시에 회의가 있으니 거기에 참석하면 삼성에 빨리 익숙해지는데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해서 알아 보니, 매일 6시까지 근무하고 회사식당에서 저녁 먹고, 7시부터, 월요일에는 생판(생산판매)회의, 화요일에는 품질회의, 수요일에는 생산회의, 목요일에는 무슨회의 등등 매일 회의를하고, 9시나 되서 퇴근하는것이 습관화 되어있고, 아무도 정시 퇴근 시간이 몇시인지를 아는 사람 조차 없었다. (출근은 8)

그러니 처음 들어온 새색시가 시집 습관대로 할수 밖에 없어, 처음 몇주는 따라 했지만, 피곤도 하고 생리에 맞지도 않고 안되겠어서, 하나씩 하나씩 빠지기 시작하여, 한달 남짓 후부터는 품질회의에만 계속 참석하고 나머지는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다. 일년 열두달 토요일은 물론 정상 근무지만 일요일에도 전부 출근하여, 쉬는 날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미국에서 평생을 5 근무만 하다가, 6 근무까지는 하겠는데, 일요일은 쉬어야지 나이가 들어 어쩔수 없다고 선언하고, 일요일은 아예 처음부터 출근을 안했다.

퇴근도 남은 이렇게 9시가 넘어야 퇴근하는데, 체면상 5 퇴근은 할수 없어, 6시에 모두 식당으로 저녁 먹으로 간후에 살몃이 빠저나와 버렸다. 그래도 장유유서 덕인지, 늙었다고 (그래봐여 50 초반이었지만) 대우를 해준건지, 아니면 품질에 관심이 없어서였든지?, 임원의 출퇴근은 비서실에 매일 보고가 된다는데,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이, 그사람은 그런사람으로 굳어버렸다. 나야 삼성에서 출세할 생각이 있었든것도 아니고, 계약에 의해 최소 2년만 견디면 된다는 뱃장이었으니까, 겁날것도 없었다.

이렇게 사내에서 사고 전환에 주력하면서, 주로 미국과 유럽에 산재해 있는 고객 방문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가는곳 마다 품질 불만의 공격이 들어오는데, 나도 할말도 없고 정말 힘들었었다. 그저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의 3년계획만 싫것 광고하고 돌아오기가 일수였는데, 지금 당장이 문제인데 2-3년을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이냐고 짜증 섞인 말을하는 고객들의 심정도 이해 할만하고, 그저 미안하다고 사죄하면서, 너의들은 수십년 해온 기업이고, 삼성반도체는 이제 겨우 두세살된 어린애니까 이해해 달라고 설득하면서, 되도록 당장 터저있는 불량에 초점을 맞추어, 그뒷처리 방안이나 상의하고 오는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고객 방문이 잦아지면서, 태평양 횡단이나 유럽 여행이 10 시간을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상무 전무는 비지니스 클래스를 태워주는데 그것도 힘들어서, 미쩌야 본전이라고 임원회 자리에서 관리본부장인 전무에게 사정이 이러니 예외로 일등을 타게 해줄수 없겠느냐고 했드니, 사람이 호탕하고 나에게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해주면서, 예산이나 인원 보층도 잘해주는 사람이어서, 그자리에서그렇게 하세요.” 하는 바람에 삼성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비행기도 사장 부사장만 타게 되어있는 일등만 타고 다녔었다.

한편, 생산량에 너무 관심이 커서, 품질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투자도, 그래도 어려운 기술제품이다 보니까 연구소 투자도 많이 하고, 수량을 늘리느라 생산설비 투자도 했는데, 품질보증부의 설비는 턱없이 빈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것도 3년계획속에 포함시켜, 점진적으로 강화시켜 나갔고, 앞서 말한 관리본부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별문제 없이 계획대로 진행시킬수가 있었다. 하기야 우리가 아무리 투자를 한다고 해도, 생산설비나 연구소설비에 비하면 몇십분의일 밖에 안되니까, 그로서도 그렇게 큰문제는 아니었겠고….

이래서 점차적으로 품질보증부의 불량 검출력이 높아지고, 품질보증부 Engineer들의 기술이 경험을 바탕으로 눈에 뜨이게 향상되고, 데이타가 제대로 정리되어 품질의 추이가 한눈에 추이도 (Trend Chart) 나타나게 되니까, 우선 연구소부터 성급하게 적당히 설계해서는 양산으로 넘길수가 없게 되었고, 훨신 정성드려 설계 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번은 개발회의를 하는데, 우리 QA 사소한 불량이 걸려 들어, 이것을 개선해서 생산에 들어 가자고 했드니, 출하가 급하다면서 달라고 하기에, 정그러면 사소한 불량이니 줄수 밖에 없겠는데, IBM에서 불량이 나서 문제가 됬었으니까, IBM 출하만은 안되겠다고 했다. 사실은 제품의 고객이 IBM이라는것을 알고 소리였지만, 연구소에서도 소리에만은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출하를 늦추고 불량을 제거한 후에 생산에 넘기겠다고 자진해서 자기네 요청을 철회한 일도 있었다. 영업도 처음에는 빨리 팔고 싶어 연구소 편에 섰었으나, 나중에는 잘했다고 고맙다고 했다.

이러면서 한편으로는 품질기획과 사원들을표준작업"작업표준작성법" 그리고 Line Audit 하는 방법을 몇달을 두고 내가 직접 우선 교육한 다음에, Line 투입하여 Audit 시작하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표준준수율 5% 10%, 표준과 실제작업이 얼마나 따로 놀고 있느냐?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공장장 이하 간부에게 copy 보냈드니, 그들도 믿어지지가 않아, 처음에는 Audit 잘못 됬다고 항의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은 숫자를 믿을수 밖에 없었고, 라인에 있는작업지도서" 100% 전부 새로 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새로 쓰여진작업지도서 (작업표준)” 반듯이 품질관리부와 품질보증부의 동의를 받게 제도화 하였지만, 처음에는 완벽한 작업표준을 써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것을 쓰려니까, 여전히 부실한 점이 많아, 어떤것은 세번 네번 다시 쓰기도 했었다. 이래서 명색상으로나마 작업표준을 다시 쓰는데에만, 일년이상이 걸렸고, 현실에 맞게 쓴것이기 때문에 준수율도 40% 50% 까지는 쉽게 올라갔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작업표준의 부실 때문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작업자의 무신경 때문에 거기서 다시 준수율이 올라가기는 무척 힘들었었다.

이래서 데이타를 매주 만들어 공장안에 널리 배포하면서, 라인간의 경쟁을 붙이고, 우수부서는 포상도하고, 부과장 간담회에서 얘기도 많이 하고, 이런 노력으로 차차 개선되었지만, 내가 삼성반도체를 떠날때 까지도 80%선을 넘기지 못했었다. 희망은 90%선을 넘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삼성에서 일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었든 몇가지 사실이 내눈에 띠었다. 우선 삼성사람들은 지위의 고하에 관계 없이 삼성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상사를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금성사나 다른 한국 회사에서는 우리 끼리 모여앉아 사석에서는 회사 불평도 많이 했고, 상사 욕도 많이 했었는데, 삼성에서는 그런 소리를 들어 일이 없었다. 이것도 삼성의 교육의 덕인지? 삼성인의 프라이드 때문인지는 몰라도, 놀라운 일이었다.

또하나는 삼성에는 일류 대학 출신이 거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의 일류 대학 출신들은 거이 모두가 대학원이나 KIST 몰려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장은 한양공대 출신이고, 임원중 서울공대 출신은 공장장과 나뿐이고, 연세대 공대출신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일류대 출신들이 이렇게도 기업에 진출을 안한다는 사실이 국가를 위해서나 본인 자신을 위해서나 과연 잘하는 짓인지?

그리고 신입 사원의 희망 직종은 제일 지망이 거이 모두 연구소였다. 아마 명함에 연구소라고 쓰는것이 그렇게도 좋게 보였나 보다. 미국에서는 제일 사장으로의 출세가 빠른것이 Marketing이고 그다음이 생산관리 아니면 경리 출신이다. 고객을 제대로 이해 해야 사장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 출신의 최대 결점이, 자기 생각에는 희안한 아이디어의 제품을 개발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소비자의 취향이나 시장을 이해 못하고, 자기 중심의 좁은 안목으로 보게 되는 일이 많아, 개인의 취향으로 판단하기 쉽기 때문에, 사업에 실패할 확률이 무척 높다. 따라서 연구소는 출세보다는 연구 생활 자체가 좋아서 새로운것을 힘들여 개발해 놓았을 때의 기쁨으로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내가 어릴때 꿨든것 같이), 승진도 고작해야 연구소장인데, 한국에서는 명함의 타이틀이 그다지도 중요한것 같았다.

한국교육의 문제점도 내가 겪은 어려움 중의 하나였다. 기술 사원들이 대학을 나와 아는것은 많은데 응용력이 없었다. 대학 입시에서 조차 OX문제로 입시를 보다보니, 암기식으로 백과사전은 됐지만, 그지식을 활용 할줄을 몰랐다. 무슨 일을 하나 추진하려면 Data 제대로 정리할줄도 모르고, 보기 쉽게 양식을 만들줄도 몰랐다. 대학을 나왔다는 친구들에게, 양식 까지 만들어 줘야하고, 데이타 정리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줘야하니 정말 한심스러웠다. 우리 아들들이 회사에서 일하는것을 보면, 매사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고, 일도 자기가 찾아서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잘도 하든데, 이것이 비록 진도는 느려도 국민학교에서 부터 응용위주로 가르치는 미국 학교와, 백과사전 대량 양성에 주력하는 한국 교육과의 차이임을 절실이 느꼈다 (요새는 평준화한다고 수준 마저도 낮추어 놓은 모양이다. 삼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시기심 때문엔지, 하두 인구밀도가 높아 경쟁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래서 한번은 경기도 교육청에서기업과 교육" 대한 강의를 100여명의 경기도 중학교 교장에게 해달라고 하기에삼성은 교육제도가 잘되있어, 회사근무에 필요한 지식교육은 입사 후에 우리가 할테니, 백과사전 고만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응용력을 키워달라" 한시간 이상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들로서도 현실적으로 학부모 등쌀에 어쩔수 없었을테고, 내말은 공염불이 되었을것이 틀림 없었다.

또하나 신기했든것은 삼성근무 10여년에 수많은 사람들을 공석 사석에서 만났지만, ”하나님" “교회" "기도" 라는 단어를 들어본 일이 없다. 삼성이 비기독교인만 채용했을 이도 없는데 정말 신기했다. 미국인과 수십년을 생활하면서, 대부분이 예수교 신자일 예수교 국가에서, 미국인들에게서는 감탄사로 “Oh my god”하는정도 외에는 이런 단어를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지만, 한국인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에게서는 처음 만나면 10 15분도 안지나 거이 틀림 없이교회 나가십니까?” 소리를 듣게 되고, 안나간다면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한것 처럼 선교하기 바쁜데, 삼성에서는 그런 광신자가 없는지? 함구령이 내려젔는지? 한번도 이런 단어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여담이고, 앞에서 말한 노력으로 삼성반도체의 전체 분위기가 서서히 품질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품질 데이타도 내가 입사한지 일년쯤 후부터는 점점 향상되는 수치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삼년이 될때 쯤은 일제와 거이 맞먹는 수준까지 향상되었으며, 4년후에는 일제를 능가하여 미국의 메이저 고객들로부터 삼성 DRAM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었다. 이때부터는 나도 고객 방문이 떳떳해저, 고객 방문이 신나는 일로 바뀌었었다. 이렇게 삼성 DRAM 일제 수준에 가까워젔으나 아직 공인이 되지 않았을 무렵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한번은 미국의 Hewlett Packard사에서 구매 담당자들이 구매 기술사원을 데리고 7-8명이 기흥공장을 방문하여, 자기들이 150만불 어치를 발주를 내야겠는데, 삼성품질이 의심스러워 어쩔가 망서려진다고 해서, 영업에서 아무리 애써도 보따리를 풀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회의실에서 만나, 우리 품질의 과거와 현항 그리고 전망을 추이도로 설명하면서, “우리 생각에는 우리 품질이 이제는 틀림 없이 일제와 최소한도 같거나 오히려 우수하다고 보지만, 이것을 증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 너의들에게 증명은 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너의들에게 말만 믿고 발주를 하라고 할수도 없고, 너의들이 내말을 얼마나 믿느냐? 상오 신뢰로 결정할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 30분간 프레젠테이숀을 했드니, 15분정도의 여유를 달라며 옆방에 가서 무언가 소근대고 돌아 와서는지금까지 네가 한말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에, 너만 믿고 발주하겠다" 150만불어치의 발주를 하고 돌아갔다. 결국 처음부터 고객의 신뢰 구축이 가장 선무라며, 거짓 데이타를 만들게한 결과가 나타난 셈이었다.

한번은 반도체 경기가 급작이 좋아지면서, DRAM값이 20-30% 단시간에 상승한 일이 있었다. 기회를 놓질세라 삼성이 DRAM값을 전부 올리면서, 미국의 NCR 부터 이미 수주가 되어있는 물량의 가격 까지 올려버렸다. 이것은 사실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으로, 품질도 나쁜 삼성이 이런짓을 하니까 NCR에서는 화가 머리끝 까지 나서, 이제 삼성과는 일체 거래를 않을 테니 찾아 오지도 말라고 금족령이 내려저 버렸다.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갔드니, SSI 미국인 세일스 맨이 이래서 NCR에는 가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번 해보자고 전에도 한두번 찾아가서 안면이 있든 NCR Director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기에도 삼성이 아직 이런 국제 비지네스에 경험이 많지 않아 실수를 저지른것 같아 대단히 미안하다. 한국내에서는 그것이 통하는데, 외국과의 관례를 몰라서 그렇게 됬는데, 내가 좀더 사정을 설명하고, 무조건 사죄하러 가고 싶은데, 나만 만나 줄수 없겠느냐?. 이렇게 실수를 저지르고, 사달라 소리는 절대로 염치가 없고, 그저 사죄만 하고, 동안 지난 관계를 생각해서 점심이나 한번 사고 오고 싶다" 했드니, 그래도 삼성의 전무가 (그때는 전무였다. 미국인에게는 다같은 Director지만, 그래도 Sr. Director라는 명함을 갖이고 다녔으니까, 그냥 Director보다는 높게 봐주었다.) 사죄하러 오겠다니까, 너만 오라고 했다.

그래서 혼자 미국 중부의 Kansas주의 시골 구석인 Wichita 있는 NCR 구매사무소를 찾아 갔드니, 친구들도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할일이 없었든지? 3-40명이 회의장에 가득 모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이것이 모두 삼성이 국제 경험이 많지 않아 생긴 일인데 백배 사죄한다", 무릅까지 꿇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사과를 하고, “이런 판에 어떻게 너의들에게 우리 물건을 사달라고 하겠느냐? 앞으로 너의들의 마음이 저절로 변하지 않는한, 사달라는 요청은 안하겠다. 단지 우리 제품의 품질이 점점 향상되고 있으니, 품질 담당자로서 그저 너의들의 참고 사항으로 분기마다 한번씩 와서 보고만 하고 싶은데, 그것도 받아줄수 없겠느냐?” 간청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품질의 현항과 계획 전망을 간단히 프레젠테이숀을 하고, 간부 몇명에게 점심을 샀는데, 자리에서 Director 화가 풀려서, “우리도 삼성 제품을 사고는 싶지만 품질도 나쁘고, 상도덕도 안지켜서 그랬는데, 관심은 많으니 분기에 한번씩 와서 현항을 알려 달라" 훨신 누그러젔었다.

그후에 매분기 마다 빼지 않고 꼬박 꼬박 찾아가서 너댓번을 가면서도, 한번도 우리 제품을 사달라 소리는 안했다. 그랬드니 일년 후에야, “그동안 너의 프레젠테이숀으로 삼성의 품질 수준은 알겠으나,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간단히 확인해 보겠으니 쎔풀을 달라"면서, “너의 끈기(Persistancy) 우리가 젔다" 농담을 했었다. 그후에는 오히려 NCR 굉장히 호의적으로 바뀌어, 간단한 시험만으로 OK 났고 비지니스가 다시 재개 되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이외에도 여럿이 있는데, 이래서 영업부장이삼성 DRAM 반은 영업이 판것이 아니고 전무님이 팔아 주셨읍니다"라고 고마워 했다. 이말속에는 과장도 섞여 있었고, 약간의 아첨성도 끼어 있었지만, 전혀 근거없는 말도 아니어서 기분은 좋았다.

앞에서 상무가 갑자기 전무로 둥갑을 했는데, 이것도 사유가 있었다. 입사해서 몇년이 되니까, 삼성 육사 출신 (공채 출신) 모두 한두개급씩 올라가, 입사 때에 이사이든 사람들이 상무 전무로 진급을 하는데 (과장 부장은 오래 걸려도, 임원 진급은 왜그리 빠른지? 일년 이년만에도 잘도 올려 주었다.), 같은 간부후보생 출신은 (낙하산부대라고 우리 끼리 얘기도 했지만 미국서 영입한 계약 임원들) 계약이 그래서인지 만년 이사 상무가 판이었다. 삼성에서 출세할 생각은 없었다고 몇번 얘기한바 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인데, 나보다 훨신 젊은 친구가 전무가 되는데 나만 상무로 있을라니 나이가 있는데 아무리 직급에 관심이 별로 없는 나에게도 체면이 안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사장실에 들어가 이점을 따지면서, 전무 이상의 부사장이나 사장은 사장단회의에 들어가, 회장앞에서 꼼작 못하고 앉아 있기 싫어 시켜줘도 안하겠지만, 전무는 시켜줘야지 체면이 안서서 안되겠다고 하면서, 안시켜주면 사직하겠다고 공갈 처서 겨우 전무로 월급도 안올리는 진급도 아닌 진급을 하였었다. 그래도 쫓아 내는것 보다는 미운 하나 주는셈으로 시켜준, 진급도 아닌 명친 변경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래서 겨우 얻어낸 전무 타이틀이었고, 그후에는 퇴직할 때까지 올려달라 소리도 안하고, 올려 주지도 않아, 전무 타이틀을 고수하다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