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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I의
경험
1958년9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2월에
쎄미코어를
고만둘때
까지의
11년반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지만,
금성사와
쎄미코어외에는
모두가
임시직장이어서,
크게
배운것도
없고
여기에
쓸만한일도
없었고,
결국은
이 두회사로
대표되는데,
이시기는
나에게
“성장기(成長期)”였다고나
할까?
여러가지를
배우고
느끼면서,
금성사에서는
주로
이런것은
하면안된다,
쎄미코어에서는
주로
이렇게
해야한다는것을
체험하였고,
그후의
나의
경영철학을
확립해나간
시기였다.
그에 비하여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KMI부터는
이렇게
해서
이 두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립된
경영철학을
실제로
적용하면서,
과연
내 사고나
경영방법이
옳으냐?
그르냐?를
시험하고,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시행기(施行期)”였다.
내가
구지
시험했다고
하는것은,
한국
회사중에는
미국식
경영제도에
입각한
이런
경영을 한
회사는
물론
없었겠고,
미국회사에서도,
제도는
어느
미국
회사에서나
실행하고
있는
미국식
제도였지만,
사고방식에서의
경영
마인드는,
근본적으로는
미국식이었지만,
대부분의
미국회사에서도
볼수없는
특이한
“조동인식"
경영방식이었기
때문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또 성공한다해도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미지수였었고,
그렇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어,
기회가
있으면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었다.
그런 참이었는데,
쎄미코어에서
Local Sales Manager를
하고있든
나에게,
196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전화가
왔다.
쎄미코어에서
함께
일했든
최만립씨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지금
좀 만나잔다.
그는
미국시민의
재미교포로,
훼어차일드
본사에서
채용하여
쎄미코어에
파견되어
2년동안
쎄미코어의
경리부장으로
나와
함께
있다가
몇달전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사람인데,
갑자기
돌아와서
만나자니
무슨
급한일이
있나하고,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라
통행금지도
해제돼어
있었기에
차를몰고
시내의
그의
호텔로
가서
만났다.
그랬드니, 그의
말이,
자기가
미국의
AMI라는
MOS-LSI를
만드는회사와
Deal을
하여,
한국에
AMI의
MOS-LSI조립공장을
세우기로
했는데,
Operation의
총책임을
지고
공장장으로
함께
일해줄수
없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월급도
쎄미코어에서
받는것보다
훨신
높은
액수를
제시했지만,
월급보다는
내가
원하든
기회가
온것
같았다.
그런데
반도체회사에
있었지만
MOS-LSI가
뭔지도
모르겠고,
AMI라는
회사도
어떤회사인지
처음
듣는
회사였다.
그래서
그게
뭐냐니까,
AMI는
American Microsystems Inc,라는
Silicon Valley에있는
신흥회사로,
생긴지
3-4년
밖에
안되었으나,
아무도
양산을
못하는
MOS-LSI의
양산에
처음성공하여
떼돈을
벌었고,
번돈을
세금으로
뺐기기
싫어서
한국에
투자를하여
공장을
세우겠다고
한다고
했고,
MOS-LSI는
Metal Oxide Silicon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라는데,
상과출신의
경리부장하든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해줄수는
없었지만,
제품의
이름으로
보아,
대형집적회로의
일종으로
반도체인것만은
틀림없으니
못할것도
없을것같아,
한번
해보자고
그자리에서
승락을
하였다.
이것은 후에
차차
알게
된것이지만,
MOS-LSI는
트랜지스터가
수백개
들어가있는
집적회로로,
요새는
수억개도
한개의
칩에
집어넣으니까
최근기술로는
수백개라면
SSI(Small Scale IC)에
속하지만,
그당시로는
초대형이었고,
이것은
당시
반도체의
TRIO 1세대였든
훼어차일드,
모토롤라,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3사가
모두
실험실에서는
먼저
성공했으면서도
대량생산에
실패한것을,
훼어차일드에
있든
세사람이
훼어차일드를
나와서
AMI를
세워,
세계처음으로
대량생산에
성공하였고,
그때
막 보급이
시작된
탁상용
전자계산기에
(콤퓨터가
아니고
산수
계산을
하는
계산기)
쓰기시작하여
유일한
공급자로
큰돈을
벌었었다.
요새
유명한
반도체
TRIO 2세대인
인텔,
AMD, National Semiconductor도
거이
같은
때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는
AMI보다
작은
회사였다.
이때에
AMI가
한국에
투자를
결정한
또하나의
이유는,
AMI가
제품의
조립은
전량
멕시코의
티유아나에
있는
회사에
위탁생산한
후에,
조립된
제품을
AMI로
갖어다가
최종검사를
거처
출하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리꼬"가
계산기
메이커로서
AMI의
가장
큰 고객의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어
일본으로
직수출하는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판단하에,
처음에는
리꼬에서
사는
물량만
한국에서
만들기로
하고
한국투자를
하기로
했었다.
이래서 1월
2월에
걸처
쎄미코어를
청산하고
3/1일자로
새로
입사한
회사가
대한마이크로전자주식회사
KMI(Korean Microsystems Inc.)로,
부평수출산업공단에
자리잡고,
쎄미코어에서
나와함께
약 열명남짓이
빠져나와
합류하였었다.
이때에
쎄미코어에서
합류한
사람중에는
심규만,
안중규
두사람이
있어,
나하고
함께
KMI삼총사로
활약했는데,
둘다
나보다
나이가
몇살아래고,
공장경험은
나만큼
없었으나,
심규만씨는
인하공대
전자과
수석
졸업생으로
기술에
강해,
쎄미코어의
기술부
차장으로
역시
재미교포였든
다그라스
김이라는
사람밑에서
일하다가,
KMI 기술부장으로
합류하여,
재품기술,
공정기술,
품질관리를
담당하기로
하였고,
안중규씨는
나오기는
한양공대
화공과를
나왔는데
굉장한
노력가로,
처음에는
쎄미코어의
창고사원으로
입사하였으나,
공대나오고
창고근무가
싫다고
나에게
창고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하기에,
내가
생산기술부장으로
있을
때에
발탁하여,
처음에는
생산설비
정비과를
맡겼드니,
얼마안가서
생산설비를
다루는것이
공대
기계과나
전기과
출신보다도
더 잘
다루었고,
추가로
건물과
공장설비를
다루는
시설과
까지
떼어주었드니,
그것을
소화하는데도
몇달
안걸렸을
정도로
새기술
흡수가
빨라,
내가
Local Sales Manager로
자리를
옮긴후에는,
내후임으로
생산기술부를
전부
맡겼었는데,
그후
그의
노력은
화공과
출신인
그를
한국
최고의
반도체공장설비의
권위자로
만들어
놓았었다.
성격면에서도, 심규만씨는
차분하고
냉정하고
논리적인
반면에,
안중규씨는
열정적이고
다분히
감성적인
데가
있어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부하의
일이라면
공사를
가리지많고
쫓아다니며
돕기도
하지만,
일을
위하여는
부하를
혹사시키기도
잘하는
성격이었고,
그의
사전에도
불가능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래서
이세사람의
능력이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처
성격적인
조화도
잘 되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나는공장장으로
공장운영에
전체적인
책임을
맡았고,
생산부장은
적임자를
못찾아
내가
임시로
겸임하여
과장들을
데리고
일했다.
심규만씨는
기술부장으로
사장직속으로
일했고,
안중규씨는
내 밑에서
생산기술부장으로
쎄미코어에서
내가하든
생산기술부
업무를
전부
고대로
담당하였었다.
이렇게 인적구성을
하고,
나는
1970년3월1일에
공식입사와
함께
미국
AMI본사로
두달간
교육
받으러
떠났고,
심규만씨는
나보다
일주일후에
AMI에
와서
함께
두달간
교육을
받았다.
이것이
나에게는
처음으로
가는
미국이었는데,
마침
둘째누나가
미국을
가게되어,
둘이서
함께
하와이로
먼저가서
2-3일
머믈면서
하와이
구경을
하고
L.A.로
갔었다.
(그때는
대한항공이
하와이
경유
L.A.가는것
밖에
없었다.)
하와이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미국땅에서
첫날밤을
자는데,
누구나
경험하는것이지만,
시차
때문에
열두시경
잠이
깨어서
잠이
안들어
고생을하다가,
안되겠어서
달밤에
체조나
하자고
호텔을
나와
처음보는
야자수
나무가
많은
하와이의
한밤중
거리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어떤
좀 허름한
옷을
입은
백인
청년이
하나
다가오드니
저녁을
못먹어서
배가
고픈데
좀 도와달란다.
언듯
생각나는것이,
해방후
부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인에게
만날
얻어먹기만
했는데
그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것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
두말도
안하고
거금
일불을
주었다.
나는
이런경우
얼마나
주는건지
전혀
몰라,
한국기준으로
일불이래야
별것아니라고
생각하고
주었는데,
이친구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절을
과장
좀 보태서
수십번은
하는것
아닌가?
나중에
AMI에
가서
이 얘기를
했드니,
AMI친구들이
웃으면서
보통
10전을
주고,
많이주어도
25전짜리
동전하나
주면
굉장이
많이
주는거란다.
그러고
보니
미국
애들이
우리보다
되게
짠모양이었다.
어쨌든
1945년
해방후부터
1970년까지,
무려
25년을
얻어먹기만
했는데,
이제
그 빚의
일부나마
갚았으니
기분이
좋았었다.
이렇게하여 L.A.를
거쳐
San Francisco공항에
도착하니
생산담당
부사장이
공항에
나와서
마중해주었고,
그길로
Santa Clara로(Silicon
Valley의
일부)
내려와서
저녁
때가
다되었기
때문에
식당으로
먼저
대리고
갔는데,
Roast Beef가
좋다기에
시켰드니,
미국인들이
얼마나
대식가인지?
(요새는
그때에
비하면
반도
안주는것
같다.)
고기가
하도
두껍고
커서
고기를
위아래로만
짤라서는
너무커서
두께로도
짤라야했고,
1/3도
못먹고
두손
들었다.
그랫드니
Doggy bag을
가저오래서
싸주면서,
아파트에
갖어가서
두고
두고
먹으란다.
세상에
사람을
개취급을
하지
Doggy bag에
음식을
넣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저의들도
체면상
사람이
먹기위해
갖어간다고는
못하고,
거짓말인지
서로
빤히
알면서도
개주게
갖어간다고
거짓
핑계대고
갖어가는
모양이었다.
주는대로
받아들고
아파트에
갖어가서
일주일은
조히
김치찌게에
넣어
먹었든것
같다.
그보다도,
Santa Clara라는
미국동네가,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길을
물어
보려해도
걸어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마치
죽은
도시
같고,
사람은
건물속에
있거나
차속에만
있어,
복잡한
서울서
살다가
뭐 이런동네가
다있나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온동네에
나무가
많아,
도시
전체가
공원
같은
느낌이었고,
공연히
과시욕으로
비싸고
잘 자라지도
않는
정원수만
심는
한국에,
이렇게
포플라든
버드나무든
뽕나무든
잘 자라고
크게 자라는 잡목이라도
잔뜩
심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싶었다.
어쨋든 처음간
미국이라
신기한것도
많았지만,
제일
놀라운
경험은,
한사무실에
화가인
아주머니가
제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집에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둘이서
그 아주머니집에를
갔었는데,
아무리
화가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의
누드초상화를
자기가
그려
응접실
벽에
큼지막하게
붙여놓은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안이
벙벙하고,
아무리
쌍놈
동네라고는
하지만
이럴수가
있나
싶어
정말
놀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는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초대한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혼한
전남편이고,
또하나는
새로
사귀어
데이트중인
남자친구란다.
세상에
상상도
못할
쌍놈
동네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했는데,
더 가관인것은
전남편과
새 보이
후렌드
둘이서
마치
십년지기처럼
정답게
얘기를
하고
있어,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후에
미국에
살면서도
이런것을
다시는
듯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아마
우연히
California 쌍놈중에도
최고
쌍놈들을
만났었든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정말
우연히
색다른
구경을
한것이고,
그외에
회사친구들이
아주
친절하여,
주말이면
매주
여기저기
대리고
다녀서,
Lake Tahoe나
Yosemite국립공원등
경치좋은곳도
많이
구경하였고,
미국의
두달은
정말
재미있게
보냈다.
그럭저럭
두달이
지나
한국에
돌아갈
무렵이
되었는데,
내가
생산담당
부사장을
찾아가서,
AMI가
미국인
경영자를
KMI에
파견
하겠느냐는것을
물었었다.
내가
“AMI가
미국인을
파견하면,
너의들의
마음은
편하겠지만,
한국사람들은
시키는것만
수동적으로
하려할것이고,
스스로
책임지며
능동적으로
일하지는
않을것이다.
반대로
너의들이
아무도
파견을
안하면
모든것을
우리손으로
할수밖에
없고,
우리가
전책임을
지고
능동적으로
일하겠지만,
너의들은
경험없는
우리만
믿고
불안할것
아니겠느냐?
나는
우리힘만으로도
충분히
할자신이
있지만,
중요한
문제인
만큼
결정은
당신이
하라?"고
했드니,
몇일만
생각해보자고
하드니,
몇일후에
“경영을
위한
미국인은
하나도
안보낼테니까
네가
전책임을
저라.
그대신
기술자
한명만
2년간
파견하되,
경영에는
전혀
참여
안하고,
기술적
문제가
있을
때에
자문에만
응하도록
하겠다"고하여
좋다고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나는 나대로
“조동인식"경영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모험을
한것이었지만,
이것이
외국에
회사를
세웠다하면
수십명씩
자국인을
파견하는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의
차이이기도
했고,
이렇게
외국인만에게
회사를
믿고
맞길줄아는
미국인이야말로
국제화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어짜피
저의들
나라
자체가
가지각색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다
보니까,
외국인이라는
개념이
우리같이
강하지가
않고,
어느나라
사람이나
모두
같다는
개념이
강한것이
미국인이었다.
그러면서 안중규씨가
한국에서
공장건설
업무를
진행시켰는데,
AMI의
시설담당
Manager가
KMI에
차가
몇대나
설수있는
주차장을
만들겠느냐고
묻기에.
다섯대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했드니,
종업원을
몇명이나
채용할건데
다섯대분
주차장이면
되느냐고,
도무지
믿으려들지를
않는
촌극도
있었다.
(저이들이야
종업원마다
차를
몰고
출근하지만,
한국에서는
회사차
몇대밖에
없다는것을
그들은
믿으려
들지
않았었다.)
그보다도,
그들은
공장건물을
짓는데
설계에만
최소
6개월,
건설에
거의
1년을
잡았다.
그소리를
들은
안중규씨가
웃기는
소리
말라고
저에게
맞기면
한국에서
설계
시공
합쳐서
6개월에
끝내겠다고
하여,
AMI사람들이
기절을할번
했었다.
그래도
안중규씨가
하도
자신있게
큰소리를
치니까,
그러면
해보라고
맡겼고,
실제로
안중규씨
자신이
설계사무실에
가서
밤을
꼬박
세우면서
설계
개시
1개월만에
건물공사를
착공했고,
4개월후에는
첫 여공을
뽑아
넣었으니까,
6개월도
안되서
준공은
아니지만
일을
시작하여,
AMI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대신
공기조절
에어닥트
설계도
하기전에
골조공사가
끝나는
바람에,
에어닥트가
골조
빔을
통과해야하는
서로
상충되는
설계가
나와,
할수없이
에어닥트를
꺾어서
설치해야하는
무리한
경우도
한두군데
있었지만,
이것이
안중규식
공사였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5월초에
KMI가
착공되어
8월초에는
사무실이
생겼고,
이때부터
쎄미코어에서온
간부
10여명
이외의
새로
뽑은
신입사원을
출근시켜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KMI는
처음부터
신입사원을
전혀
경력이
없이
갓 고교나
대학을
나온
사람만
뽑았다.
이것은
기성회사에서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만
뽑아,
처음부터
"KMI정신(KMI
Spirit)”을
불어
넣겠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였고,
신입사원이
들어
오면
첫날
첫강의는
내가
직접하면서,
1) 회사는
자선사업체가
아니고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세웠다.
자선사업체로
오해하지
말라.
2) 사람은
진열대에
있는
상품과
같아,
수요공급에
의하여
값이
결정된다.
한국에
전자과
출신은
한명밖에
없는데
전자회사가
많으면
달라는데로
줄수
밖에
없고,
그반대라면
싸구려
월급
밖에
못받는다.
일잘하는
고품질의
상품은
비싼값을
받고,
일못하는
저품질은
적은값
밖에
못받는다.
따라서
자기
값을
높이려면,
자기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
밖에
없다.
3) 당신네들의
하루
8시간은
회사가
산것이기
때문에
회사
맘대로이고,
그대신
회사는
하루
8시간
외에는
아무권한도
없으니까
너의들
마음대로이다.
4) 회사는
8시간내에
완수할수
있는
이상의
일은
주지
않는다.
이것을
8시간
이내에
끝낼수
있는
유능한
사람은
일직
집에
가도
좋고,
8시간내에
못끝내는
사람은
자기가
무능해서
그렇다는것을
깨달아야한다.
따라서
사고가
터져
회사의
귀책사유에
의한
연장근무는
예외지만,
평소에
8시간
이상
근무했다고,
신간외
근무수당을
달라고
한다거나,
자기는
열심히
일했다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사람보다는,
능률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한다.
5) 많이들
생활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데,
어떤기준의
생활이냐에
달렸다.
하루
세끼
라면으로
때우는
최저생활은
보장하지만,
놀러도
다니고
호화롭게
사는
생활은
보장할수
없다.
이러한
애매한
요구는
할 생각
말라.
6) 이런것들은
한국식
개념으로는
받아드리기
힘들겠지만,
옳건
그르건
싫건
좋건
관계없이
현실인데
어쩔것이냐?
냉정히
생각해서
판단해주기
바란다.
대개 이런
내용으로
강의를
했는데,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한국사회로서는
기상천외의
내용들이어서,
신입사원들이
어리둥절
했었지만,
입사후
나중에
돌아오는
말들은
대단히
긍정적이었고,
많이
배웠다고
고맙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공장은
대부분
안중규씨의
아이디어로,
전형적인
한국공장과는
전혀
다르게,
옅은
하늘색과
흰색으로
칠하고,
담을
없애고
정원수
나무를
심어
담을
대신했고,
앞에는
잔디밭을
깔아
비치
파라솔을
꽂아서
종업원들의
휴식처를
만들었고,
딱딱한
경비실을
없애고,
건물안의
현관에
그들을
두어
경비보다는
안내자라는
교육을
시켜서
(금성사
정문옆의
경비실이
생각나서)
되도록
딱딱한
분위기를
없애려
노력하여,
부평공단의
명물로
등장하였었다.
8월
중순에는
첫여공
20명을
뽑아
교육을
시작했고,
그후
매주
20명식을
충원하여
2주식
교육을
시켜
현장에
투입하였는데,
한참
더운때에
건축공사가
끝이
안나서,
에어콘도
없이
땀을
뻘뻘흘리며,
코카콜라였든지
사이다
였든지를
상자로
사다놓고
교육받는
여공들에게
제공하면서,
일을
시작하였었다.
이렇게하여 9월초
부터
시작품(試作品)을
만들었는데,
AMI에서
생산에
노련한
생산기술부장이
2개월쯤
와서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외는
경험이
전혀없었든
한국인들만의
힘으로
시작품도
만들었었다.
이래서
정성드려
만들어
AMI에
보냈드니,
100% 불량이란다.
AMI에서
불량분석을
하여
나온
결론이,
무언가
눈에
안보이는
오염에
의하여
회로가
단락(Short)이
되는데,
그 오염물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르겠단다.
이래서
이
“보이지않는
오염물"이라는
“유령"과
싸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알고보니
시설과에서
작업장
바닥이
광택이
나라고
광택제를
칠했는데,
이것이
마르면서
투명한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제품위에
올라앉아,
400도의
고열에서
타면서
탄화하여
회로를
단락시킨다는것을
발견하느라
10월
11월의
두달이
꼬박
걸렸다.
결국
의도는
좋왔지만,
AMI에서는
안하든짓을
한것이
잘못이었고,
무어든
새로운것은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질때
까지는
절대로
시행해서는
안된다는것을
이경험을
통해서
철저히
배웠다.
작업장 바닥의
이 광택제를
열심히
문질어
전부
제거하고,
몇일간
온사원이
청소에
매달려
다시
공장안을
깨끗하게
하는데만
일주일이
넘겨
걸렸고,
이래서
새로
만든
시작품이
AMI에서
OK가 된것이
1970년말로,
KMI로서는
가장
반가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이런과정을 거치고,
1971년
정초부터
정상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역시
경험이
모자라
여러가지
고생을
하였지만,
AMI에서
파견되어
2년간
상주키로
되어있든
기술고문과
상의도
하면서,
그런대로
큰사고없이
순조롭게
생산을
해냈었다.
여담이지만
이기술고문이라는
친구가
어떻게
김치를
좋와했든지,
우리가
보통
먹는양의
배는
먹은듯,
부임
일주일만에
배탈이
크게나서,
아마
열흘은
출근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고생한일이
있었는데,
그후에는
위가
맵고
짠 김치에
적응을
한듯,
다시는
문제가
없었다.
이러면서 내가
하루에
한두번씩은
현장
순찰을
하면서,
쎄미코어
사장에게서
배운것을
시행했는데,
시어머니
잔소리를
많이
하면서,
지적하는것이,
가슴에 뱃지가
제대로
수직으로
달려있는가?
현장 개개인
마다
작업대
앞에
걸려있는
작업지침서가
삐뚜로
걸려있는것
없고,
너무
낡은것은
없는가?
드라이박스 창문은
100% 제대로
닫혀있는가?
드라이박스가 항상
일열로
놓여있는가?
작업대나 책상위가
제대로
정돈되어있고,
모든것은
수직
수평으로
반듯이
놓여있는가?
손가락으로 구석을
흘터서,
먼지있는곳은
없는가?
등등 제품과는
상관없는
내용
뿐이어서,
나중에는
내가
들어가면
모두
자기
가슴부터
처다보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했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가는
사람은
쎄미코어
얘기를
읽어
볼것)
이렇게 작업하여,
작업개시
6개월만에
AMI의
멕시코
티유아나
공장에
비하여
불량율을
90% 줄였고,
1년후에는
95%까지
줄일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개에
몇불이
되는
자제비
절감액이
엄청난
액수가
되었고,
KMI의
총운영비의
몇배가
되어,
결국
KMI는
돈한푼
안들이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공장이
되었었다.
이렇게 한
반년을
순조롭게
운영하면서,
공장이
점점
자리를
잡아갔는데,
AMI의
멕시코
티유아나공장에서
AMI가
하루에
몇백만불식
손해가
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사고의
원인은
간단한것이였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우리는
기회가
잘됬다고
티유아나공장의
물량을
전부
KMI로
옮기자고
제안했고,
AMI도
처음에는
KMI가
소량생산을
하니까
그렇게
잘하고있지,
수량이
늘어나도
그런운영을
할수
있겠느냐?고
의구심을
나타냈지만,
워낙
대형사고로
손실이
컸든
직후였고,
KMI의
실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마침
티유아나공장과의
계약이
3개월후에는
끝나게
되어있어,
3개월내에
생산량을
5배로
늘일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3개월에
생산량을
5배로
늘인다는것은
벅찬
일이기는
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것에
동의
했고,
이래서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간,
일주일에
20명식
뽑아넣든
여공수를
60명으로
늘이고,
20명씩
3교대로
24시간
교육을
실시하였다.
작업도
2교대에서
3교대로
늘여,
밤열시부터
아침6시까지의
야간반이
신설되었고,
여공뿐아니라
이를
뒷바침할
정비공과
생산주임등,
전부를
새로
뽑아
훈련해서
넣자니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때에는
사무실도
닫혀있어,
창고도
3교대를
시작해야했고,
나를
위시해
간부가
모두
없는동안이라,
간부들의
관리감독도
없는
상태에서,
밤샘일에
익숙치않은
사람들이
일을
할려니
졸립기도
하겠고….
그런속에
새로
추가되는
생산기계도
속속
도착하여
이것들을
설치도
해야하고….
이러면서 3개월
동안
AMI가
요구하는
물량을
전부
소화시켰지만,
똘똘
뭉쳐진
KMI전종업원의
의지로
사고
한번
없었고,
AMI가
제일
우려했든
불량율도
1%정도
높아졌을뿐,
별 변화
없이
유지할수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는
이것을
주시하든
AMI의
최고
경영진에서
KMI를
“기적을
일으킨
공장
(Miracle Operation)”이라고
극찬하여,
KMI사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고,
따라서
사기도
문자그대로
충천하였었다.
이렇게 생산량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든
9월의
어느날,
갑자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내일
KMI를
방문하겠다고
알려왔다.
우리야
항상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는
회사니까,
아무준비도
없이
있는그대로
대통령을
맞이했는데,
박대통령은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은듯,
한달쯤후에
당시
서강대학
전자과를
다니든
자기
딸 박근혜양을
(지금의
한나라당
당수)
KMI에
일주일인가
이주일동안
실습을
보냈고,
10월에는
내가
청와대에가서
산업포장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AMI의
전물량을
인수하고,
유일한
조립공장
역활을
한지가
불과
어제
같었는데,
4/4분기에
들어서면서,
반도체업계에
불항이
닥처왔고,
AMI에서는
감원
선풍이
불었었다.
이렇게
되자,
AMI에서
KMI도
여공수를
1/3만
감축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제안을
받고,
AMI에
전화를
걸어
“사정은
이해하지만,
한국에는
감원이라는것이
없다.
더구나
불과
몇달전에
미친듯이
증원해놓고,
지금
감원을
한다면,
KMI의
사회에
대한
체면은
여지없이
손상되고,
체면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국에서,
앞으로는
사원을
뽑지도
못할런지도
모른다.
계산해보니
우리
여공월급의
1/3은
너의들의
기술자
1-2명분
밖에
안되는데,
거기서
한두명의
기술자를
더 감원하는것이
AMI의
앞날을
위하여
훨신
유리할것이다"라고
설득하며,
감원은
못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AMI도
더이상
강요는
못하고,
감원은
안하기로
했는데,
물량은
적으니,
공장이
놀아야할
판이었다.
이래서
주 6일근무가
주 5일근무로,
거기서
다시
4일근무까지
하면서
견디어
나갔었다.
그러다가
년말이
되었다.
어짜피
공장은
놀다시피
하는
판인데,
내가
사장을
찾아가서
미친소리
같은
제안을
했다.
“어짜피
할일도
없는데,
공장을
년말
년초의
두주일간
문을
닫고,
여공들을
시골집에가서
쉬도록
합시다.”
여기
까지는
좋왔는데
“지금 사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는데, 전사원에게
반달치 월급만 년말
보너스로 주어 휴가비로
쓰도록합시다" 이때의 사장의
얼굴은
지금도
기억한다.
공장장이라는
친구가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안았구나
라는
그표정. 그러나 나는
나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당시의
반달치
월급이라야
수천불밖에
안되는
금액이었다.
한국의
보나스는
원래가
강제저축의
성격을
띤것으로,
회사가
잘되든
못되든
때가되면
주는
예정된
보너스로,
이것을
받고
회사에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것이
통례인데,
이런
어려운
시점에
예상치
못한
보너스를
받으면,
사원들이
얼마나
회사를
고마워할것인가?
결국
얼마
안되는
금액으로
사원들의
애사심과
단결심을
사자는것이
나의
제안의
기본이라는
설명을
자세히
듣고는,
처음에는
놀랐든
사장도
결국은
내말에
동의했고,
이래서
전사원이
보너스를
받고
두주일의
휴가를
즐길수
있었다.
(이것은
후에
설명하지만
반년도
안가서
그 몇배로
되어서
회사로
돌아왔다.)
이것외에도 한번은
사장이
아가씨들이
회사의
이름이
인쇄된
편지지를
사용으로
쓴다고
불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들이
자기집에 회사 이름이
인쇄된 편지지에 편지를
써보내면, 그 부모가
자기 딸이 뭔가
출세한것 같아 얼마나
좋와하겠고, 아가씨는 얼마나
회사가 자랑스럽겠느냐?
한달의 총비용의 1-2%밖에
안드는 사무용품비의 다시
몇%도 안드는
편지지 값이라면, 아예
매달 한권씩 아가씨들에게
주고, 그것으로 집에
편지쓰라고 장려합시다"라고
하며, “그래서 아가씨들의
사기가 올라가면, 0.001%의
불량율감소만으로도 그비용은
충분히 카버할수 있다"고
하여, 편지지를 주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사장이
인색한 소리를 못하게
한일도 있었다.
또
한번은
사장이
무언가를
계기로
일 잘하는
여공은
내년
창립기념일에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고
즉흥적인
약속을
여공들
앞에서
한 일이
있었다.
창립기념일은
닥처오고,
해외여행을
시켜
줄래도,
경비는
둘째고
해외여행을
아무나
할수있든
시절이
아니라
여공들의
여권을
낼 길은
없고,
약속은
지켜야겠고,
사장을
찾아가
그렇게
즉흥적으로
약속한것이
잘못은
잘못인데,
종업원에게
상사가,
특히
사장이,
약속한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종업원이
회사
말을
믿을것
아니겠느냐?
여권을
낼 길이
없으니
외국여행은
안되겠고,
제주도도
바다
건너
해외는
해외이니
제주도라도
비행기
태워
보내자.
생전에
비행기
타본일
없는
아가씨들이
얼마나
좋아
하겠느냐?고
설득하여,
창립
일주년
기념일에
40명의
우수
여공을
선발하여
비행기를
태워서
일주일의
제주도
여행을
보내기도
했었다.
또한번은
사원들의
월급을
올려
줄 때가
되었는데
내가
사원들을
모아놓고
"너의들
금년에는
얼마나
올려주면
되겠느냐?
솔직히
요구해
봐라"하고
물어
보았다.
이렇게
정면으로
물어보니,
오히려
무리한
요구는
못하고,
대략
7-10%선의
요구가
나왔다.
이렇게
요구를
듣고
사장에게
가서
이런
요구가
있었는데
12%만
올려주자고
했다.
원래
정신
나간
소리
잘하는
공장장이라,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사장도
그때의
소수
사원수로
몇%가
큰돈도
아니고
하니까
결국은
승인을
해서
평균
12%의
월급
인상이
실시되었고,
그후부터는
회사의
월급인상폭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내가
KMI를
떠나
미국으로
오기
일년전
쯤 해서
전국적으로
노조
결성
운동이
활발하여젔었고,
특히
도시선교사업회라는
예수교(?
이것도
예수교라고
해야할지
모르지만)
종교단체가
노조
결성을
적극
선동하고
다녀,
부평의
수출공단
내에서도
골치꺼리였다.
그러나
그들도
끝내
KMI만은
침투를
못했고,
나는
"너의들이
들어와서
멋대로
선동해
봐라.
나는
절대로
막지도
않겠고,
그래도
KMI에는
절대로
노조가
안생긴다는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다.
공장이란,
시설도 좋아야하고 기술도
좋와야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종적으로 제품을
만들어내는것은 사람이고,
얼마나 사람들이 스스로
일할려는 생각을 갖이고
회사에 협조하는냐?가,
특히 여공들의 마음가짐이
공장 성공의 열쇠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날때마다 식당에가서
그들과 잡담도 많이
하면서 그들과 친근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뿐아니라,
언제나 여공중심의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제품은
아가씨가 만든다. 생산주임이나
현장기술자는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것이 업무가 아니라,
그들만의 힘으로는 안되는
부분을 지원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과장은 사원만의
힘으로는 경험이나 권한이
부족하여 안되는 부분을
도와주기 위하여 존재하며,
나는 너의들의 힘만으로는
안되는 부분을 경험과
권한을 활용하여 도와주기
위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너의들의 지원요청이 없다면,
나는 놀고지나도 된다"는
소리를 수없이 했었다.
해가 바뀌어
1972년이 되었다. 생산물량은
여전히 얼마 안되고,
노는사람은 많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사람은
원래가 너무 한가하면
해이해지고 불평만 는다.
그래서 머리를 짜내어,
어떻게하면 이들을 더
바쁘게 할것이냐를 궁리한끝에
머리에 떠오른것이
“ZD (Zero Defect) 운동"이었다. (작업자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불량을
제로화 시키는 운동)
그런데 ZD운동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었다.
할수없이
시내
서점에가서
이에대한
책을
있는데로
사다가
읽고,
드디어
사원들
앞에서는
전문가나
되는것처럼
큰소리치면서,
ZD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ZD운동
원래의
목적대로
불량율을
줄이자는
개선활동보다는,
사원들
전원을
바쁘게
만들고,
어디엔가
정신이
쏠리게하여,
정신이
해이해지는것을
막자는데에
나의
더 큰
목적이
있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관련자가
아니면
재미없겠기에
생략하겠다.
이러면서 몇달을
지나다보니
2/4분기부터는
다시
반도체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고,
AMI의
물량도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한명도
감원은
않고,
그동안
실질적인
작업훈련만
시킨
꼴이되었고,
년말
보너스와
휴가덕에
회사에
대한
신뢰감과
애사심도
최대로
높아저
있었기
때문에,
전종업원이
아무리
무리한
잔업도
즐겁게
대해주었고,
이래서
AMI의
물량요구에
100% 대응할수
있었으며,
AMI는
AMI대로
고객의
요구를
100% 제때에
충족시킬수
있었다.
결국
돈으로
계산할수는
없었지만,
년말보나스는
엄청나게
싼값으로
사원들의
애사심을
산것이
되었었다.
그후에는 특기할
사건은
없었고,
KMI는
순항을
계속했었다.
미국의
AMI로
출장을
오면
늘 부사장이
공항에
나와
영접을
해주었고,
AMI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은
팥으로
매주를
쑨데도
고지들어
주었다.
이래서
KMI는
나의
일생의
최대
걸작품이었지만,
이것을
이만큼
성공
시킨것은
KMI삼총사를
중심으로
강하게
단결된
KMI전사원과
이런
사람들간의
팀웤,
합리적
미국식
제도,
그리고
한가족
한식구
같았든
회사의
분위기,
이런것들이
모두
합쳐저
이룩해낸
산물이었고,
나도
이때가
일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행복했든
시절이였다.
이러면서
부장들과
일주일이
멀다고,
화곡동
우리집에
퇴근길에
모여
포커도
많이
했고
(모두
집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눈치볼
어른도
없고,
집사람이
이런
접대를
좋아했기
때문에
장소는
늘 우리집이
되었었다.),
전 부장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산정호수로,
대천해수욕장으로,
경주로,
현충사로
놀러도
많이
다녔다.
부장들뿐만
아니고,
전사원이
한집안
한식구처럼
지났기
때문에,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후에
미국에
이민온
옛
KMI식구들이
많아
(직위에
관계없이),
분기에
한번씩
골프대회도
하고,
년말이나
년초에
망년회나
신년회도
하면서
가깝게
지나고
있다.
이러다가 그이듬해인
1973년
여름에,
AMI에서,
미국인들이
한국을
너무
몰라
(그때의
미국인은
해방직후나
625때의
가난했든
한국밖에는
본사람이
거이
없었다.)
업무가
순조롭지
못하니,
나보고
2년간만
와있으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개몽시키고,
AMI-KMI간의
연락관이
되어달라는
요청이
왔다.
원래
붕어도
저살든
물이
좋다고,
미국에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2년정도라면,
결혼할때에
10년내에
외국구경
시켜준다고
집사람에게
약속한것도
기간이
1년을
초과했고,
앞으로
어짜피
세계가
국제화
될터인데,
애들에게
일찍
영어를
가르치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수락하고,
1973년9월에
이리로
왔는데,
결국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
주저앉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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