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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의 TMI 생활
우리가
미국에 처음 가 있었든 때가
AMI의 전성기로, 1975년
초부터, KMI가 아무리 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장 한곳에 전생산을
맡겨놓았다가, 화재라도 난다든가
사고가 나면 큰일이라고, 아무래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제2공장을
물색하게 되었고, 결국 대만에 제2공장을
세우기로 하였다. 우리는
미국일주여행에서 돌아오면 슬슬 귀국준비를 하려고
했었는데, AMI가 AMI내에는
조립을 계속 멕시코나 한국에서 했기 때문에, 조립공장에
경험이 많은 사람도 없으니, KMI경험으로
2년간만 대만에 현지사장으로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면서, 대만근무가
끝나서 2년후에, 미국에서
AMI근무를 계속하든지 KMI로
돌아가든지, 그때가서 마음데로
할수있게 전가족의 영주권을 얻어주겠다고 했다.
이제안을
놓고, 여러가지로 궁리를 해보았는데,
KMI에서 사장도 내말을 잘 들어주었지만,
그래도 공장장(나중에는
“이사"라는 타이틀을
추가하여 “이사 공장장"이라고
했지만)이었는데, 사장노릇
한번 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겠고, 내
마음대로 운영하여 KMI의 성공을
다시한번 반복할수 있을런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고, 아이들도 2년쯤
더있다 귀국해도 큰문제는 없지 않겠나 싶어
가기로하였다.
원래
나는 사교성도 없고, ENJOY
TODAY나 좋와하지 열심히 일하는것도 싫어하는
내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사교도
해야하고, 전사원의 생활을 책임지는 큰
부담도 저야하고, 잘되면 좋지만 실패할
때도 생각해야하는 위험도 싫어서, 독립회사
사장은 하고싶지 않지만, 실질적인
지점장이지 진짜 사장은 아닌 현지사장은 한번 해봐도
괜찮을것 같았다.
그래서
생산담당 부사장인 보스와
KMI 때와 똑같은 담판을 하였다. 나
이외의 다른 미국인 사원을 또 파견하겠느냐? 나혼자만
보내겠느냐? 나 혼자만 보내면, 나도
대만인들에게, 나는 2년만있다가
돌아갈것이고, 그동안에 너의들이
AMI에 익숙하게 되면, 그후는
이공장은 너의들 손만으로 돌려야하니, 그동안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나한테 배우라고 이들을
훈련시키겠다고 했드니, KMI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너만 자신이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이번에는 선선히
승락하였다.
이래서
1975년 4월인가 5월인가에
영주권 신청을 했고, 미국일주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출장형식으로 대만을 들랑거리면서,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부지를 선정하고, 간부사원을
뽑고, 식구들이 살 집을 찾아보기도하고,
애들 다닐 학교도 알아보고, 대만생활을
배우고… 하면서 보냈다. 이과정에서
회사설립과 부지선정등은 회사내의 변호사나
생산기술부장등이 주로 일을 진행시켰고, 나는
주로 사람뽑는 일만 하였는데, 대만에
처음 도착하는날부터, 애를 먹었었다.
대만인들은
비지니스하는 사람은 그런대로 영어를 잘하고,
이상하게도 외국과 관련없는 사람도 전부
영어이름을 갖이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대만인은 영어를 하나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이름만은 Charlie Chew란다), 외래어도
전혀 쓰지 않고 모두 중국어로 번역해 쓰고있어, 택시,
TV, 엘베이터, 호텔등등 어느
나라에서나 흔하게 쓰이는 영어 단어도 안통하는
나라였다. 택시는 그래도 발음을 따서
的士라고 쓰고 택시 비슷한 발음을 하지만, TV는
전기로 보는것이라 電視, 엘레베이터는
전기사다리 電梯, 호텔은 옛날부터
식당이 발전해서 생긴듯 大飯店이다. 더욱
우리 한국인을 헷갈리게 하는것은 기차가 火車이고
자동차가 汽車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호텔이름이 영어 이름과 중국어 이름이 전혀
관련없는것이 대부분으로, 따이뻬이에서
가장 큰 圓山大飯店의 영어이름이 Grand Hotel이다.
이정도의
기본상식은 있어야 내가 첫날 당한 얘기를 이해할수
있을텐데, 대만
도착 첫날 따이뻬이공항에 내려보니, 온통
한자밖에 없고 영자는 하나도 안보이는데, 다행이
한자 몇천자는 학교에서 배웠고, 우리
때에는 한국의 신문도 사회면 빼고는 한자를 썼으니까
무엇이 무엇인지 대강은 짐작이 가서, 별문제
없으려니 했는데, 택시를 집어타고
“Grand Hotel”하니까, 기사
양반이 두눈만 크게 뜨고 뚤어지게 처다만 보지 도대체
갈 생각은 않는것이었다. Grand Hotel이
圓山大飯店이라는 사실도 몰랐고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고, 정말 난처하였다. 할수없이
나는 “Grand Hotel”만 연상 반복하고,
운전수는 눈만 껌벅거리고… 국제선
공항에 들랑거리는 택시 기사가 이러니 참 희안한
나라였다. 한참을 이렇게 신랑이를
하다가, 기사가 안되겠는지 나가서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그친구에게
“Grand Hotel”이라고 했드니, 고개를
꺼떡이며 기사에게 圓山大飯店이라고 했는지? 그래도
호텔까지 제대로 태워다 주었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해서 사람을 뽑는데,
쎄미코어에서 미국인 사장인 Mr. Clevenger에게서
배운것이 있어, 점심도 사주면서
여러사람을 인터뷰를 했는데, 이러면서
알게 된것이, 한국에서는 대학을 나오면
으례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는것이 원칙인데, 중국인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이 많건 적건, 구멍가게라도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고, 취직은
정말 자본으로 쓸 돈이 없는 사람만 하는것이 원칙이었다.
(이래서 한국은 몇몇의 재벌이 GNP를
거이다 만들어내고, 중소기업은
영세기업들인데, 대만은 중소기업이
대만의 GNP를 거이다 담당하고 있다)
또 이들은 상호신뢰가 대단하여, 처음
사람을 만나면 우선 믿으려들지 않아 한동안 시간이
걸리지만, 어는정도 시간이 지나 한번
믿기 시작하면 철저히 믿는 국민이었다.
이래서
친구 서너명이 공동출자하여 작으마한 사업을 시작하고,
그중 한명이 사장이되어 사업을 하면, 나머지는
전혀 그사업에 관여도 안한단다. 그래서
돈을 벌면 또하나의 사업을 벌려 두번째 친구가
사장이되고, 두회사가 벌어서 세번쩨
사업을 시작하고… 이래서 결국 모두가
사장이 된단다. 그동안은 서로가
100% 철저히 믿어, 사업에
실패를 해도 그친구와의 사이에 금이 가는 일이 없다니,
우리한국인과는 너무나 다르고, 이래서
중국인은 전세계 어느곳에서나 China Town을
만들고, 똘똘 뭉처 돈을 버는것 같다.
어쨋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Jackson Wang이라는 王先生을(先生은
중국어로는 Mr.이지 학교선생이 아니다.
선생은 師父 또는 恩師) 생산부장
자리의 No.2 Man 후보로 만났는데, 똑똑하고
괜찮을것 같아서 월급을 얼마나 주랴니까 $500을
달라고 했다. 그당시의 대만
월급수준으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월급이었지만,
$500을 달라는 사람에게 $1,000을
주겠다고 했드니 이친구가 눈이 휘둥그레젔다 (Mr.
Clevenger는 내월급을 깎으려 했지만, 나는
배로 주겠다고 했으니, 내가 더
고단수아니었을까?). 내 계산은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 대만에서 아무래도 한사람은 내 심복이
있어야겠고, 한사람만 $500 더주어봤자
일년에 $6,000인데, 그정도야
회사 전체경비에서는 미미한 금액이니, 이것으로
그의 신뢰와 충성심을 살수 있다면, 정말
싼 값이라고 판단했었다. 역시 그후
내가 대만에 있는 2년동안, 이
王先生은 2년후에는 자기가 사장이
될것이 틀림 없다고 믿기도 했게지만, 정말로
나에게 지극히 충성스러워, 공사 가리지
않고 내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고, 다른
간부보다 나이도 제일 많고 경험도 많아, 전체
대만인 사원들을 휘어 잡아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주어서, 내일이 굉장히 편하게 되었고,
회사로서도 년$6,000의
몇십배 몇백배로 득을 보았었다.
공장은
대만 중부의 따이중(臺中)에
있는 수출공단에 자리를 잡았는데, 공단내에는
이미 건물이 전부 골격은 서있어,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어서 비교적 빠르게 공장을 지을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1976년여름에
약 1년걸려 가족전원의 영주권도 나오고,
애들의 학년이 끝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사를하여, 대만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Morrison Academy라는 미국계 Mission School이
있어,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되어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내외는 아무리 한자를 알기 때문에, 회사의
문서도 영어가 아니고 한자로 쓰게 했지만, 중국어를
배워야 편할것 같아서, 중국어
가정교사를 채용하여 집에서 내외가 함께 석달을 중국어
(본토의 북경어) 공부를
했는데, 석달만에 四聲 때문에 기권하고
말았다. 원래가 음치인 내가, 석달을
배워도 똑같은 탕자 발음을 사성의 악센트만으로
구별하여, 湯과 糖을 구별하려니, 가정부에게
국을 갖어오라면 설탕을 갖어오고… 이래서
기권했지만, 그래도 안배웠든것보다는
후일 많이 도움이 되기는 했었다.
그런데
이러는 사이에 AMI에서는
디지탈 손목시계 사업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10 $15 하는 Casio시계보다도
기능이 없는, 한가지 시간만 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계였으나, 세계 최초로
AMI가 금색으로 고급시계같이 만들어 팔아서
한개에 $200 이 훨신 넘게 받았었다.
이 시계 사업은 Silicon Valley의
Sunnyvale시에 공장을 세워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쓰이는 LCD가 지금은 수십인치 TV용도
쉽사리 만들지만, 그때는 세계최초의
제품으로, 손목시계용의 그 조그만
LCD도 그렇게 만들기가 힘들어, 백개를
만들면 60-70개가 불량으로 못쓰게 되는
판이었다.
이래서
AMI에서 대만공장을 애당초 계획대로
반도체조립공장으로 할거냐? LCD 조립공장으로
할거냐?를 놓고 꽤나 설왕설래가
있었든듯, 우리가 대만으로 이사한 후에,
하루가 멀다고 (과장좀
보태서) 이것 한댔다 저것 한댔다
뒤잽이를 수없이 했었다. 다행히 이것을
하건 저것을 하건, 건물 자체는 먼지
없는 깨끗한 공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내장공사를하고,
사무실을 만들고…. 이런것은
진행시켰는데, 전기공사나
배관공사등은 어떤기계를 설치할건지 결정이 나야
공사를 시작할수 있지, 미친년
널뛰기하듯 하도 바꿔재껴서, 대만인들에게
체면도 안서고, 공사도 할수없고…
거이 매일 같이 AMI와 전화로
싸움을 하면서 정말 고생 많이했다. 순전히
정신적인 고생이었지만,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니까 할일도 없이 매일을 놀자니, 금성사에서도
이미 경험했지만 그것도 쉬운일은 아니고, 그렇다고
AMI에서 언제 어떤 소식이 올런지도 모르니
멀리 여행을 갈수도 없고, 더구나
뽑아논 간부들 앞에서 설명도 못하겠고, 적당히
둘러 댈라니 거짓말은 원래가 내 특기도 아니고… 누구한테
하소연 할 사람도 없고, 전화통에 대고
AMI의 보스에게 화푸리도 더러 했지만, 지사장도
사장이라고, 사장이라는 직업이 이렇게
외로운 직업인줄은 정말 몰랐었다.
이러면서
내장공사를 하는데, KMI에서
안중규씨가 이런공사에 익숙한 과장을 보내주어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공사를 맡은 업자가
나보다 나이가 위이고, 대만도 한국보다
더 오래 일본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말이 유창하여,
한국인과 대만인이 일본말로 얘기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원래가 대국 국민이라, 세밀한데는
신경을 안쓰고 대충하는 성격이 있어, 문짝은
밖에서 안보이고 사람이 출입만 할수 있으면 되지, 문틈이
벌어져 있거나 문이 좀 삐둘게 달려도 그런것은 신경도
안쓴다. 따이뻬이에, 밖을
검정 대리석으로 발라 멀리서 보면 웅장한 고급
고층건물이 있는데, 자세히 가서보면
벽이 하나도 똑바른데가 없고 모두 삐뚤 빼뚤이다. 이런
중국인 업자를 데리고 Dust Free Clean Room 공사를
하자니, 속터지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내방을
만들면서 벽을 무늬목으로
(일본말인 "쓰기이다"가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이름임) 씨우기로했는데,
무늬목은 나무를 둥굴게 깎아서 만든것이기
때문에, 나무결 무늬가 똑같은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무늬를 보고
비슷한것 끼리 차례로 번호를 붙여주고 그순서대로
붙이라고 했는데, 다음날 가보니 모두
제멋대로 붙여 놓았었다. 하도 화가
나길레 발길로 걷어 차서 구멍을 뻥 뚤어놓고, 새로
붙이라고 해놓고 집에와서 생각하니, 이것
잘못하다 몰매맞고 대만에서 쫓겨나는거나 아닌가? 슬몃이
걱정도 됐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업자가 집으로 전화를 하고, 저의가
잘못했으니 전부 새로 사다 붙이겠다고 백배 사죄를 하여,
역시 대국국민은 인내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하고 감탄을 하면서, 몰매는 안맞겠다고
안심도 되었었다.
이렇게
반도체를 할거냐? LCD를
할거냐?를 놓고 1975년
3/4분기 내내 뒤잽이를 하다가 결국 년말이
다되어 LCD를 만들기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워낙 신제품이다 보니까,
대만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나도
LCD소리는 처음듣는 제품이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지경이었다. 이래서
반도체를 위하여 뽑아놨든 기술간부 서너명을
Sunnyvale공장에 파견하여 두달동안 LCD 기술교육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Sunnyvale공장
기술자를 지원받아 대만공장 전기공사 배관공사를 하고
, 우리 기술간부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생산기계설치를하고, 첫 여공20명을
뽑아 교육하고…… 어쨌든 이래서,
우연히 우리의 결혼기념일인 1977년4월15일에,
드디어 TMI라고 (Taiwan
Microsystems Inc. 臺灣豪電公司 - 豪자는
크다는 뜻도 있지만, 극히 미세하다는
뜻도 있다고하여 Micro를 豪자로 썼다)
“대만에서 대만종업원이 일하고, 한국인사장이
경영하는 미국회사"의 준공식을
갖게되어, 세나라가 참여한 진짜
Global Company TMI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대만공장 얘기를 들은지 2년후이고,
우리가 대만으로 이사간지도 거이 일년후의
얘기이니, 미국인들이 일을 진행시키는
속도를 가히 알만 할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TMI가
가동을 시작하였는데, 내가 TMI에서
한일은 KMI에서 한일과 거이 같은
일이었다. 하루에 두세번 라인을 돌면서,
가슴에 뱃지(명찰)가
비뚤게 달려있지 않은지? 드라이 박스가
똑바로 되어있고 문은 꼭 닫혀있는지? 공구가
쓰지도 않는데 작업대에 놓여있지나 않은지? 손가락으로
훌터봐서 먼지가 없는지? 그저 이런거나
챙기면서 시어머니 노릇하고 다녔다.
단지
LCD가 어떻게 글씨를 나타내는지 원리조차
몰랐으니까, 미국서 배워온
기술간부에게서 이론 강의도 듣고, 불량이
왜 나오는지? 이들과 상의도하고, 이런것들이
처음에는 한동안 추가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일은 왕선생에게 맡겨놓았기 때문에, 그래도
바빠본일은 없고, 여전히 하루에
5-6시간정도나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식당에가서 아가씨들과는 말이 안통하니까, 영어할줄
아는 간부나 사원들과 얘기도하고, 가끔
사장실 문닫아 놓고 낮잠도 자며 지났다. 또한가지
KMI에서는 안하든것이라면, AMI와의
전화연락은 내가 도맡아서 한것 정도랄까?
그러나
LCD를 처음 만들어 볼라니까 기술적 어려움도
많았다. 반도체도 굉장히 청결을
요구하지만, LCD는 반도체 조립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미세한 먼지하나만
들어가도 이것이 10배 20배로
확대되어 검은점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결국
불량으로 떨어지고, 이래서 TMI의
LCD조립은 주로 먼지와의 싸움이었다 (먼지라는것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먼지). 그런데
원래 중국인이 청결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국민들이라,
이들의 사고를 바꿔놓는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그래도 왕선생이 큰역활을
해주어, 작업개시 반년만에, 불량을
Sunnyvale공장보다 반이하로 줄일수 있었고,
또한번 자제비 절감으로 AMI에
막대한 돈을 벌어주어, AMI 사람들을
다시한번 감탄하게 해줄수가 있었다.
한편,
대만인들도 늦게 퇴근하는 버릇이 있어,
정시인 5시에 퇴근하지 않고
7시 8시 퇴근이 예사였다.
그래서 KMI에서와 같이,
“회사는 8시간 이상의 일은
맡기지 않으니 8시간내에 자기일을
끝내지 못하면 무능한 인간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는 능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러번 설득을 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늦게 퇴근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사무실 사원 전원을 모아놓고,
“너의들이 전원 퇴근할 때까지 나도 퇴근
않겠다. 나좀 일직 집에 가게 해달라"라고
하소연하고, 퇴근시간이 되면 문앞에
서서, 전원이 퇴근하는것을 기다렸다.
이러기를 거이 한달을 하고서야, 늦게
퇴근하는 버릇을 완전히 바꿔 놨는데, 그래도
일이 지연된 일은 한번도 없었고, 업무에도
전혀 지장을 초래한 일이 없었다. 역시
늦게 퇴근하는것은 버릇이고, 늦게
퇴근하는 습관이 들면 지금 할수있는 일도 조금있다 해도
되지 하며 지연시켜, 오히려 업무를
지연시킨다는 내 지론은 틀림이 없다고 재확인했다.
대만은,
장개석 정부가 본토에서 너무 부패하여,
미국이 제공해준 무기를 공산군에 팔아
넘기는 인간까지 있어, 그 총에 자기
군인이 맞아 죽는 현상까지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이가
대만에 정부를 세우면서 고위 장성과 각료등 너댓명을
공개총살 했는데, 그중에는 자기 부인인
송미령여사의 가까운 친척도 한명 끼어 있었다 한다.
그후 부패가 살아져, 정말
깨끗한 공무원들이었다. 점심을
함께하자고 초청해도 여간해서 응하지않고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한번 공단 이사장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드니, 왈, 중국인은
점심시간이 너무 길어 업무에 지장이있어 그런다고
웃으며 둘러뎄다), TMI 약 1년동안에
뇌물인지 선물인지로 공단 공무원에 준것은 Johnny
Walker 위스키 한병을 공단 이사장에게 그들의
최대 명절인 음력 설날에 준것 밖에 없었다 (우리가
외국인 기업체라 국가 위신상 더 그런다고 대만인
총무부장이 귀띰을 하기는 했지만…).
세관도
그렇게 깨끗한데, 우리
이웃의 한 미국계 회사의 현지 사장이 홍콩계 중국인으로,
홍콩계 중국인은 저의들이 더 발전한
나라에서 왔다고 콧대가 놉게 굴다가 세관하고 되게
틀려서, 엄청나게 골탕을 먹은일이
있었다. 이회사는 “코어
메모리"라고 직경 1mm도
안되는 무지하게 작은 자기(Magnetic)성분의
Ring을 전선에 끼어 콤퓨터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였다 (지금은 그런것 안 쓰지만...).
그런데 이부품이 너무작아 한번 들어오면
억단위로 들어 오기 때문에, 세지도
않고 통관을 시켜주다가, 한번은 이것을
전수 세어서 숫자를 확인하겠다고 나서, 전
종업원이 몇일간 작업을 중단하고 들러 붙어 이것을 전부
세느라고 곤욕을 치루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자기네 잘못으로 시작되었고, 원칙대로
하겠다는데야 할말이 없어, 찍소리도
못했었다.
대만인들을
대하면서 가장 어려웠든것은 대만인과 본토인과의
갈등이었다. 대만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라고 불리는것을 반가워하지 않지만,
본토인들에게는 물론 모두가 중국인이다.
대만인들은 대만이 중국에 의해 침략 당한
피점령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원중에는
양쪽이 섞여있어 (당시에는 대만인구의
25%가 본토인, 75%가 대만인.),
함께 있을때는 중국인이라고 불렀지만, 대만
사람들만 있을 때에는 그들을 대만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장개석이가 처음 대만으로 도망와서
정부를 세울 때에, 대만인들의 항의가
거셌고, 많은 대만인들이 옥살이도하고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고하며, 그후에도
한국의 연좌제식으로 그 가족은 끝끝내 공무원이 되기도
어렵고, 되어도 일정 계급이상은 승진도
안된다는것이었다. 본토인들은 철저한
반공주위자들이지만, 대만인들은
언젠가는 “대만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공산국가건 어디건
아무하고나 교역하면서 돈벌이나 하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까 이런 감정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말조심을 해야 했었다.
대만에서는
일본어를 쓴다든가 아무데서나 일본 노래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고, 내
나이 이상이 되면 우리와 같이 일본말이 유창하여, 나도
영어보다는 일어가 더 편하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과는
일어를 많이 썼다. (한국에서는
이런것들이 법적으로도 국민의 정서적으로도
금기사항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대만을
40년이나 우리보다 더오래 점령했었지만,
일본이 한국은 일본의 일부를 만들기위하여
"內鮮一體" "一億一心"을
내세워 (젊은사람들을 위해 설명하면,
內鮮一體는 “內地 즉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다. 一億一心은
일본인구 8,000만, 한국인구
2,000만을 합처 일억인구가 한마음이다 라는뜻)
, 한국말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강요헀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성도 전부 바꾸게 했고,
징병 징용 정신대등 별짓을 다했지만, 대만은
그저 피점령국이었을뿐 이런일은 없었기 때문에, 원래가
반일감정이 한국 같이 강하지는 않았고, 본토인에게
점령당한 오늘의 일이 더 중요하여, 일본점령의
피해의식이 희석되기도 한것 같았으며, 중국인은
워낙 경제의식이 강하여, 돈벌이만
된다면 적국 언어인들 쓰면 어떠냐는 개념이 강하여,
일본을 그저 하나의 이웃나라 정도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는것 같았다. 그래도
택시를 타서 한국인이라고 했드니 처음에는 일본인인줄
알았다가 “형제국민"이라고
무척 반가워 했었다. 그때는 한국만이
유일하게 대만을 승인하고 있었든 나라라 더욱 그랬든것
같은데, 우리가 대만을 떠난 후에
한국이 대만승인을 취소하고, 중공을
정식국가로 인정한 후에는, 한국도
배반했다고 배반자 국가로 생각이 바뀌어
푸대접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성과도 올리면서 중국인들과 정말 재미있게
일하고 있었는데, TMI가
생겨난지 1년도 채 안되어, 1977년말에
AMI가 디지탈 시계사업을 모토롤라에
매각하는 협상이 시작되어, 1978년 2월에는
TMI를 모토롤라에게 매각하게 되었고, TMI도
시계사업의 일부분으로 10개월만에
모토롤라에 인계해 주어야했다. 그런데
모토롤라에서 TMI에 현지답사를 왔든
친구들이 뭐라고 보고를 했는지, AMI에서
TMI와 함께 너까지 인수했으면 좋겠다고하여,
왕복경비를 모두 저이들이 부담하겠다니,
Phoenix에 있는 모토롤라 본사에가서 인터뷰를
해보라는것이었다.
나는
AMI에서 대우를 잘 받고 있는데, 새로운
대회사에가서 새로 사람들을 사귀면서 새 출발을
하는것도 힘들고 재미없는 일일것이기 때문에 반갑지
않았지만, 호기심도 있어 Phoenix에
있는 모토롤라 본사를 찾아갔다. 처음간
도시라 지리도 어두운데, 지도한장 들고
찾다보니까, 운 나쁘게 내가 빠져야하는
고속도로 출구가 공사때문에 막혀있어, 다시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야 했고, 그러다가
약속 시간보다 거이 30분은 늦게
도착했다. 이얘기 저얘기하다가
모토롤라에서 월급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고 하기에,
어짜피 흥미없는 흥정이라 AMI월급의
배를 요구했다. 결국 이래서 모토롤라는
안가게 됐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모토롤라에의 매각의 뒷처리를 하게되었다.
어쨋든
TMI는 모토롤라가 되어 버렸는데, TMI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백배사죄했고, 그들도
나와 해여지는것이 정말로 섭섭해서 송별회를 세번이나
해주었다. 처음에는 부과장들이 하드니,
다음에는 현장의 감독사원과 기술자들
그리고 Line의 반장들이 해주고, 마지막에는
전체 여공들이 해주겠다고 하여 세번이나 받았다. 그런데
이 송별회가 내가 한국에서 회사를 자주 바꾸면서 수없이
겪은 거이 형식적인 어떤 송별회와도 달라, 정말
진심에서 울어나는 송별회라는것을 몸으로 느낄수가
있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었다. 매
송별회때마다 감사패 같은것을 하나씩 받았는데, 그문구가
어찌나 고마운지, 지금도 내방에
걸려있고 앞으로도 언제나 내옆에 있을것이다.
그런데
모토롤라에게서 잔금을 전부 받으려면 석달은
걸리겠다고, 그기간을
이용하여 동남아에 다시 반도체공장을 세울려면
어는나라가 제일 좋을런지 답사를 해봐달라는 AMI의
지시가 왔다. 그래서 온식구가 다시
호텔방을 세개를 얻어서 호텔로 옮기고, 아이들은
왕선생과 TMI 총무부장에게 부탁하고,
우리 내외는 여행길을 떠났다. 원래는
내혼자 가야하지만, 호텔 방값은 혼자
자나 둘이 자나 마찬가지일뿐 아니라 대만에 있어도
어짜피 낼거고, 밥값도 대만 호텔에
있어도 어짜피 나가는 경비고, 집사람
비행기값만 우리가 내겠다고하여, 쉽사리
AMI의 동의를 받아냈는데, 동남아
각국을 돌면서, 하루는 정부공무원을
만나서 투자조건을 알아보고, 또하루는
현지에 나가있는 미국계회사의 미국인 주재원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사흘째는
관광뻐스를 타고 그나라를 한번 둘러보는 여행이어서,
집사람이 동남아 관광을 하기에는 아주
알맞는 여행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데 문제는 그동안
TMI의 돈관리를 어떻게 할것이냐? 였다.
은행구좌에는 수십만불이 들어 있고, 계속
지불이 나가야 하는데, 원래가 TMI의
수표는 나와 왕선생과 경리부장의 셋중 둘만 싸인하면
되게 되어 있어, 내가 없으면 왕선생과
경리부장이 싸인해서 발행할수 밖에 없지만, 그들은
이미 TMI 직원이 아니고 모토롤라
직원이니, 어떻게 할려느냐고 AMI에서
나에게 큰 우려를 표명해 왔다. 그래서
“너의들은 동양인을 이해못해서 그러는데,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체면(Face)이고
명예이다. 나는 이 두사람을 철저히
믿을수있고, 사고는 절대 없을것이다.
만일에라도 그들이 사고를 일으킨다면, 그것을
모두 갚을 때 까지 내가 AMI에
무료봉사하겠다"고 했드니, 좀
미심쩍어 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후 우리 여행중에 아무 사고도 없었고,
이것이 또 TMI (이제는 엣
TMI) 사원들을 감격시킨 일화가 되었다. 원래가
도둑도 순사모자를 씨워 놓으면 도적질을 못한다는데,
서로를 신뢰하는 우리 사이에, 더구나
친구 사이에 신뢰가 한번 구축되면 배반을 모르는
중국인기질을 잘 알기 때문에, 나로서는
100% 자신이 있었다.
이래서
대만을 떠나, 홍콩,
필립핀, 태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풀과 페낭), 인도
그리고 나도 생전 처음으로 이름을 들은 인도양상의
모리셔스라는 쬐그만 섬에 까지 갔다왔는데, 전여행이
한달이상 걸려, 아이들만 너무 오래동안
호텔에 놔둘수가 없어서, 인도와
모리셔스는 나만 갔다 왔고, 집사람은
약 삼주 동안, 매일 일류식당 가서
현지에 나와있는 미국회사 주재원 내외와 일류 요리만
먹고 관광 잘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옛날에 쎄미코어에서 생산부장으로 함께 일하든
이영일씨가 훼어차일드 인도네시아공장 생산부장으로
와있어, 그내외를 반갑게 만나서 몇일
함께 지나고, 호화판 동남아 여행
잘하고 대만으로 먼저 돌아갔다. 돌아가
보니 왕선생과 총무부장, 그리고 내가
대리고 있든 비서까지 어찌나 애들을 잘 돌봐줬는지,
애들은 아무 불편도 없이, 매일
회사차로 (전에는 내차였든) 학교에
보내주고 데려오고, 호텔식당 음식
마음대로 먹고 (국민학교 학생들이),
밖에도 자주 데리고 나가 사먹이기도 하고,
주말에는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정말
고마웠었다. 더구나 떠나기전에
은행구좌건이 있어, 저이들을 그렇게
믿어준것이 저이들로서도 무척 고마웠든것 같았다.
동남아
여행 얘기는 동남아 안가본 사람이 거이 없을테고,
이것도 그것만으로도 긴얘기라 생략하지만,
인도와 모리셔스를 가본사람은 별로 없을것
같고, 희안한 일들도 많이 있었기에
간단히(?) 소개하겠다.
인도는
우선 인도양 연안의 봄배이에 먼저 가서
타지마할호텔이라는 일류호텔에 들었었는데,
식당에가서 저녁을 먹을려니까 힌두교의
채식주의자가 많은 나라라, 나같이 고기
안먹고는 못견디는 사람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중국식당이
있기에, 중국음식이야 고기없이 될이가
없어 들어가서 무언지는 몰라도 소고기 요리를 시켰드니,
이것은 십년 신든 구두를 요리를 하였는지?
질기기만하고 나같이 고기좋와하는사람도
도저히 먹을수가 없는 음식이었다. 하기야
채식주의 국가에서 고기를 먹겠다는 내가 미친놈이지…..
그렇다고 굶을수는 없고, 억지로
쑤셔넣고 나와서 로비를 지나다보니, 현관
밖에 수십명의 구경꾼이 호텔안을 드려다 보고 있었다.
누가 유명한 사람이 왔나 하고 수위에게 누가
왔느냐니까, 그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호텔안의 잘 차려입은 손님들을 보고 부러워서
구경하고 있단다. 가난한 나라도 많이
가봤지만 이런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다음날
거리구경좀 하려고 호텔을 나섰다.
그런데 워낙 더운곳인데 내가 간 3월이
제일 더운 계절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이 한결같이 몽유병환자 같아, 눈동자가
살아있는 사람이 거이 없었다. 더워서
흰 옷을 많이 입었는데, 생전 세탁 한번
안했는지, 하도 오래 입어서 그런지,
한결같이 누렇게 변색한 옷들 뿐이었다.
그보다도 호텔 앞을 나와 얼마 가지도 않아
십여세나 됬을까 싶은 거지들이 대여섯명 모여들어
구걸을하기에, 불상해서 잔돈 몇푼
준것이 화근이었다. 순싯간에 수십명이
몰려드는데 이건 것지를 못하겠다. 결국
한뿔럭도 못가서 기권하고 돌아 왔는데, 거지
때문에 거리를 것지도 못한것도 인도 뿐이었다.
사실
봄배이를 간것은 Air India의
본사가 거기 있어서였다. 모리셔스를
가려는데 봄배이-모리셔스간을 뜨는
Air India가 가장 편리할것 같아, 대만에서부터
예약을 하려 했는데, 가는것은
예약확인이 되었는데, 돌아오느편이
도저히 확인이 안되었다. 일주일 두왕복
밖에 없으니 섯불리 만석이라 못돌아 오면 사흘을 그
쬐그만 섬에서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가는곳마다 홍콩에서, 마닐라에서,
싱가폴에서, 수없이 Air
India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려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확인이 안된다는것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기장이 확인해다 줘도
몇일내로 확인해줄수 있을텐데…. 그래서
Air India 본사는 그래도 되겠지하고 봄배이를
갔는데, 거기서 본사 예약계에 전화를
걸어도 확인을 못하겠다고 했다. 할수
없이 최악에 경우 3일의 휴가나 하자고
“나도 모르겠다"고 갔었는데, 돌아오다보니
비행기에 좌삭이 반도 안찼었다. 도대체
Air India의 예약 씨스템은 뭐하는곳인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도였다. (당시의
Air India는 KAL보다 커서,
JAL다음으로 아세아 두번째로 큰회사였다.)
또하나 재미있는것 - Air India 조종사는
구름이 앞에 있으면 구름을 피해 선회하면서 비행한다는
희안한 사실. 나는 비행기를 타면 늘
창가에 앉아 밖을 유심히 살피니까 발견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봄베이에 이틀쯤 있다가 뉴델리를 갔다.
비행장으로 가면서 1딸라를
인도의 최소화폐로 바꿔서 거지에게 줄돈을 미리
마련해서 갔는데, 신호에 차가 설때마다,
10세 내외로 보이는 거지 아이들이 몰려와
돈을 달란다. 그러니 얼마 가지않아
바꿔온 돈이 동이나서, 돈이 없다니까
그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달란다. 그때
택시운전수가 저애들이 저돈으로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기에, 배가 고파서 밥을 사먹는것
아니겠느냐니까, 웃으면서 그게아니고
도박을 한단다. 그리고 이것이 인도였다.
어쨌든 뉴델리에가서 모리셔스 입국사증도
받고, 거기 공무원과 실업인들도
만나보고, 시내관광도 하루 했는데,
세계 칠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는
타지마할을 꼭 가볼려고 했었지만, 현지
실업인이 너무 덥고 길이 나빠 갔다오면 십중팔구
병들거라는 바람에 기권했다. 공무원을
만나러 정부청사에를 갔드니 (우리나라
중앙청 같은곳) 우선 그 규모에 입이 딱
벌어졌다. 아마 과장 조금 보태어, 중앙청의
10배는 되지 않을까? 가난은
하지만 대국은 대국이었다.
인도는
내가 다녀본 모든나라에 비하여,
엄청나게 거대하면서도 가장 형편없는
나라였다.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고
인도가 독립하든날, 기념식장에서
인도고위관리가 자기네가 독립하는것보다도 "영국이
식민지를 잃었다"고 슬퍼하드라는
일화가 있지만, 인도국민들은 원래가
철저한 식민지근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자기보다
조금만 힘이 없는사람은 사람취급도 안할려고하고, 조금만
힘이있는 사람에게는 온갓 아양을 다떠는것이
인도인이다. 거기에, 예로부터
철저한 계급사회로, 맨위에는 중들인
"파라문"계급이있고,
그다음이 왕족, 그다음이
귀족으로, 이를 다 합치면 약 5%정도의
인구이고, 나머지 95%는
일반시민인데, 내가 방문했든 1978년에도,
인도정부는 순전히 이5%를
위하여만 존재하고, 나머지 95%는
죽건살건 관심도 없는것 같이 보였다.
시내관광이나
하려고 호텔내의 여행사에 갔드니,
기억은 잘아나지만 몇십불을 내라는데, 동경의
시내관광뻐스의 반정도 값이었다. 더우니까
일직가는것이 좋다고 7시에 나오란다.
다음날 아침7시에 현관밖에
나갔드니 뻐스는 없고, 늘신한 새까만
리무진이 와있는데 (뻐스 리무진이
아니고, 미국에서 결혼식때 신랑/신부차로
쓰거나, 부자들의 승요차로 쓰는 큰
승용차의 진짜 리무진), 거기에
운전기사와 관광안내가 타고있고, 손님은
나하나뿐. 정말 아무리 물가가 싼
나라지만 이래가지고 사람의 일당은 싸지만 자동차
기름값이나 나오는지 모르겠었다. 어쨋든
이래서 최고급 개인관광을 하여, 깐디의
묘도 가봤고, 옛날 왕의 묘도 가봤는데,
자동차가 구경할 곳마다 서다보니까, 애어콘이
미처 차내를 냉각도 하기전에 또서고 또서고… 결국
애어콘은 무용지물이었다. 제일
놀란곳은 어떤왕의 묘를갔는데, 나는
경주의 김유신장군묘 같은것을 생각했드니, 이것은
조그만 방이 무려 300여개가 있는, 언뜻보면
궁전같은 건물이었다. 왜이렇게 방이
많으냐니까, 왕이 죽으면 그밑의 종들을
각방에 하나씩 생매장 했단다. 정말
끔직한 얘기였는데, 내세를 믿고
윤회설을 믿는 그들이라, 저세상에
가서도 왕은 종이 있어야 해서 데리고 갔단다.
아침11시가되니까
어찌나 더운지, 애어콘은 쓸모없고,
관광이고 나발이고 덧정이 없어졌다. 그래서
고만 끝내고 가자니까 꼭 한군데는 가야한단다. 어디냐?니까
씰크공장이라면서 막무가내여서 끌려갔다. 흥미도
없어 대충보고 가자니까, 인도의 씰크는
세계적으로 극상품이고 마누라가 틀림없이 좋와
할테니까 사라고 강요를 햇다. 처음에는
우리 마누라 옷에는 흥미없다고 조용히 사양을 했지만,
하도 끈질기게 굴기에 고함을 꽥지르고
걸어나왔드니 할수없이 따라나왔는데, 그날은
상점에서의 리베이트 벌이를 못해서 되게 재수없는
손님이라고 50세가 넘었을 안내인이
속으로는 욕께나 했을것 같았다. 내가
불과 몇일내에 경험한 모든얘기를 다 쓰자면 적어도
이것의 열배는 써야한다. 그저 이런
인도를 보고나니, 깐디가 독립하겠다고
한것이 오히려 잘못 생각했든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인도는 정말 희안한 나라고, 가는곳마다
사람을 놀라키는 나라였다.
이렇게
인도에서 많이 놀라고, 모리셔스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모리셔스는
인도양 서남쪽 아프리키대륙의 동쪽에 있는
마다가스칼이라는 큰섬 동쪽에 있는 코딱지만한 섬으로,
지리학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일부이다. 왼만큼
큰지도가 아니면 점으로 밖에 안나타나는 이섬은
오래동안 무인도로 있으면서 인도양을 무대로 활약하든
해적들의 본거지로 많이 사용되었었다한다. 그러다가
300여년전에 폴튜갈과 홀랜드가 각각 일시
점령하였었으나, 워낙 쓸모가 없어
철수하고, 약 200여년전에
불란서가 점령하여 백여년을 끌었는데, 약
100여년전에 영국이 기습상륙하여 불란서를
내쫓고 자기네 영토로 만들어, 인도에서
많은 노무자를 데려다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한다. 2차대전후에는
독립하여 영연방의 하나가 되었고,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여왕이 이나라의 총수이다. 오랜
불란서와 영국의 점령 덕택에, 전국민이
불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오히려
불어가 더많이 쓰이는 사회이다.
인도인이
많으나 거이 모두가 하류노동계급이고,
남아연방처럼 백인이 판을치는 나라로, 유럽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기술자들도 많아, 쉽게
고용할수 있다고 한다. 이섬은, 90%이상이
사탕수수밭으로 덥혀있어, 설탕수출이
수입의 대부분이나, 위도상의 위치가
하와이와 같아 (단지 반대쪽인
남반부지만 위도는 같다), 유럽인들에게
관광지로 널리알려저있어서, 유럽의
주요항공사의 비행기가 매일 수없이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고, 남아연방의 백인 부자들이
많이 찾아와, 그런대로 관광수입도
적지않다. 그러나 설탕만으로는 점점
살기가 힘들어져, 공업화를 하겠다고,
전세계의 투자자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AMI에서 한번 가보라해서, 방문하게
되었었다.
나도
처음듣는 섬이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뉴델리에서 이섬에 도착한것이
캄캄해진 후의 저녁때였다. 공항에서
나오니까 어떤 건장한 인도인이 택시를 타겠느냐고하여
타자고 했드니, 택시 표시도없는 차에
태우고 공항을 나섰다. 그런데 밖은
캄캄하고 차도 별로 안다니는 길을 한없이(?) 가는데,
운전수는 건장하고, 길양쪽에는
내키보다 더큰 사탕수수밖에 없고... 어쩐지
좀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한20분을
넘겨 갔드니, 전기불이 보이고 도시가
나오기에 이제는 살았다 했드니 그도시를 지나치고 또
한없이 컴컴하고 사탕수수만 보이는 길을 달리는데,
여행자는 보통 현금을 많이 갖이고있고,
여기서 운전수가 강도로 돌변하여, 현금을
뺐고 사탕수수밭에 시체를 던져버리고 가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것을 아는사람도 없을테니 실종신고
할사람도 없을테고.... 점점더
무서워지는데, 낯선 외국여행을 수없이
했지만 이렇게 겁이나보기는 처음이었다.
도시를
지나서 다시 20여분을
가니까 예약한 호텔간판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든지,
그래도 제대로 가는구나하고 그제야 안심을
할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공항은
이섬의 최남단에 있고, 수도는 중간에
있으며, 호텔은 북단에 있어, 그동안에
섬을 남북으로 종단한 셈이었다. 어쨌든
공포의 40여분이었는데, 날이
밝은 다음날 돌아보니, 바다물은 맑고,
열대성 나무는 우거지고, 정말
하와이보다 더 아름다운 섬이었다. 이섬에서
놀란것은 백화점에를 들렀드니 스피커에서 "아리랑"이
나오는것이 아닌가? 깜작놀라 점원에게
방송국에서 보내는 방송이냐고 물었드니, 그것이
아니고 자기네 백화점내에서 보내는 음악이란다. 이노래가
어디서 났느냐고 알아 보았드니 한국배의 선원이
준것이란다. 나중에 부두를 지나다보니
태극기를 단 한국원양어선이 서너척 정박해있어 사정을
이해할수 있었지만, 한국의 어선이 이
먼데까지 온다는것에 또한번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이렇게
모리셔스를 끝으로 대만으로 돌아와,
두어달을 더 지겨운 호텔생활을 하면서,
모토롤라에서 잔금을 모두 받고, TMI가
지불해야할돈을 모두지불하고, 학교가
학년도 끝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온가족이
2년동안에 정도 많이 들었든 대만을 떠나,
서울에서 일주일쯤 놀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와서 AMI에
출근하여, 사장에게 인사를하러 갔드니,
“TMI가 아니었드라면 이번
Deal이 성사가 안되었을것이고, 모토롤라가
TMI만 사겠다는것을 Sunnyvale공장과
함께가 아니면 안팔겠다고 해서 전부를 팔을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금년에는 혼자의 힘으로는 네가 회사에 제일
많은 돈을 벌어주어 고맙다" 고
면전에서 극구 칭찬을 하는데에는, 되게
기분은 좋왔지만 정말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미국으로 일단 돌아와서,
한국으로 돌아갈것인가? 아니면
미국에 눌러 앉을것인가? 를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외국생활 4년여에,
처음 예상과는 달리, 애들이
한국 학교에가서 진도를 쫓아가기도 힘들겠고, 우리도
그동안에 미국생활에 많이 익숙해졌고, 관료주의나
강력한 유교사상으로 경직된 한국사회보다는, 자유분방하고,
모든것이 합리적이고, 놀러다닐곳도
많은 미국이 내성격이나 인생철학과도 더 잘 맞아, 훨신
더 편하게 살수있을것 같아서 그대로 주저앉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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