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슬루의 조난

 

다행히 한국에서는 이런 지진의 피해는 없었지만, 1972년 4 16일자 조선일보는 한국의 햄이 비상통신을 위하여 활약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

때는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대가 눈사태를 만나 조난을 당한 직후, 한정된 국제전화 회선으로 현지와의 연락이 거의 두절된 상태에서 네팔과 서울을 연결할 있었던 것은, 네팔에 있는 유일한 아마추어 무선국 9NlMM(통칭 9Nl Micky Mouse) 모란 신부 덕택이었다. 신문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여기는 카트만두, 여기는 카트만두, 마나슬루 영봉에 얕은 구름이 끼여 있다. 카트만두 서남쪽 10 마일. 서북쪽 창문밖 30마일 지점에 마나슬루가 선명히 보인다."

l5 오후 9 16 카트만두의 햄과 서울의 햄이 한국 히말라야 등반대 조난사고에 관한 극적인 교신을 나누었다. 서울 성북구 삼성동의 아마추어 무선사 김영결(HMlBB)씨의 2층방. 김씨의 낭랑한 목소리로 가득찬 5 낭짓한 방은, 카트만두와의 교신이 시작되면서 전방 작전상황실 만큼이나 긴박감이 감돌았다.

"여기는 HMlBB, 카트만두의 9NlMM 나오시요."

김씨의 SSB 송수신기에서는 카트만두의 미국인 신부 모란(65)씨의 응답이 16분만에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9NlMM. 린다. 오버."

서울과 카트만두의 4000km 연결한 햄끼리의 긴박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국제전화보다 훨씬 선명하게 오고 갔다.

HMlBB "한국의 조난자들을 만났는가?"

9N1MM "오늘 이섭 (김예섭씨인듯) 산타바바라병원으로 찾아가 만났다. 킴은 거의 회복된 같더라. 수술도 필요 없고, 퇴원한다고 한다. 킴은 오히려 다른 대원의 안부를 나에게었다. 조선일보 윤병해 기자를 불루 스타 호텔 두번씩 찾아 갔으나 못 만나고 메모를 남기고 왔다."

"당선집 위치는?"

"가트만두 서남쪽 lO마일 지점이다. 마나슬루가 선명히 인다. 영봉엔 옅은 구름이 감싸고 있다"

(현지시간은 오후 5)

"그곳 날씨는 어떤가?"

"섭시 20도. 날씨는 맑고 쾌적하다." (중략)

극적인 햄의 대화는 14일밤 9. 등반대 조난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14 오전부터 맺어졌다. 김씨는 혹시 카트만두의 햄과 대화를 나눌수 없을까 하고 무선기를 돌렸으 허사였다.

9시, 김씨는 SEA NET(South East Asia Net : 동남아 교신망)를 불렀다. SEA NET 매일밤 9 동남아의 햄끼리 소식을 주고 받는 시간이다. 홍콩의 씰버(45. 금은방 경영)씨가 이날의 사회자로 대화를 주재하고 있였다. 김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팔국의 햄을 찾을 없겠는가?" 묻자, 씰버씨는

"지금 모란씨와 얘기를 나누었다. 곧 찾아 주마" 응답했다. 잠시후 모란신부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먼저 모란씨가

"한국 사람들이 죽었다는데 서울에선 알고 있는가?" 걱정해 줬다. 김씨가 조난소식을 알려고 불렀다고 말하자 

"아는대로 힘껏 소식을 알아 전해 주겠다." 약속했다.

HMlBB 연락을 받은 모란신부는 마침 전화가 고장이었다. 김예섭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자동차로 l6km 달려 갔다. 모란신부는 카트만두 시내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15 저녁 l0 30 본사 윤병해 기자 만날 있었다. 15일 밤 교신중 수신상태가 악화되자 같은 주파수 듣고 있던 싱가폴의 햄, 에드워드 버진(54 화공기사)씨가 나와

"잘 안툴리면 내가 중계해 주겠다." 나섰고, 남지나해상의 재팬 에어호의 승무원인 미국인 헬링거(42)씨도 중계를 약속했다. 헬링거씨는

"1주일전 부산항을 출항, l7 마닐라에 도착한다."

면서, 한국 등반대의 조난소식에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카트만두 한국등반대 조난사고 상보를 알리기 위한 긴급 통신망을 구성, 하루 세차례씩 서로 만나기로 했다.란 신부와의 무선 교신에 성공한 김씨는 지난 60, 경기고교 1학년 재학중 2 아마추어 무선기사 자격을 , 서울대 공대 1학년 l 면허를 얻은, 세계 햄들에겐 알려진 햄.

그는 68 3 서독 켈론시의 어린이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 서독 햄이 일본 가나자와대학 하지매박사가 제조한 약을 요청하고 있을 , 긴급통신망 형성, 약의 공수작전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어린이는 불행히도 죽었다. 그러나 김씨의 활약은 당시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크게 보도됐었다. (이상 신문전재)

이러한 비상통신에의 봉사는 아무도 이를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법으로도 강요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모두가 자원이며, 여기에는 한푼의 보수도 따르지 않는 순수한 봉사인 것이다. 그러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수많은 햄틀이 OSO통신 참가하여 그들의 전력을 다하여 사회에 공헌히는 것이다

이러한 햄들의 활약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오레곤 해안에 높이 솟은 등대가 폭풍우의 세례를 받았다. 굉장한 파도는 등대를 꺼버렸고, 전화선 마져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근처를 지나는 선박들이 항로를 잘못 잡아 암초에 올라 앉을런지도 모른다. 곳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 할수 있었던 것은 이곳의 등대지기가 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하나 살아 남은 보잘 없는 조그만 송신기로 미국 본토의 햄을 불렀다. 응답만 있다상대가 누구든 간에 일은 간단하다. 그는 해안무선국에 연락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에도 등대에서 햄에게로, 햄으로부터 해안무선국으로, 거기서 다시 근처를 향해중인 모든 선박에게로 등대의 급보는 전해졌고, 이래서 사고는 미연에 방지되었다.

련의 비행기가 캐나다의 상공에서 고장을 일으켜 불시착 한다는 무전을 친체 행방 불명이 되었던 일이 있었다. 비행기를 발견하여 전파의 릴레이로 모스크바까지 알려준 것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하이티의 햄들이었다.

일본의 비상통신은 해마다 겪어야 하는 태풍, 지진 함께 너무나 숙명적이다. 폭풍우로 규우슈우 본토와의 연락 끊어질 때마다 규우슈우의 햄들은 사흘씩 나흘씩 꼬박 밤을 새워가며 도오꾜와의 연락을 담당한다. l964년의 니이가다 지진 때도 수십명의 햄들이 l주일간을 밤을 새웠다.

책의 처음에 소개한 한국아마추어선연맹의 독도 익스페디션 때의 일이였다.

익스페디션의 예정일자는 끝났으나, 거샌 파도와 풍랑으로 독도에 배를 수가 없어 하루 이틀 철수를 연기하고 배가 마중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예정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몹시도 안타깝게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일행 5명 HMlAA 조요성군은 그의 동생이 역시 햄으로 HMlAB 조요윤군이였다. 독도의 HM9A 서울의 HM1AB 매일 만날 있었고, 이래서 독도의 소식은 매일 매일 그들의 가족에게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무리 그들이 늦게 와도 마음 놓고 기다릴수가 있었으며, 특히 조요성군은 독도에 앉아서 부모님과 통화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이틀 늦어지던 어느날, 독도의 통신을 담당해온 발전기가 고장이 나며 덜컥 멈추어 버렸다. 자연히 독도와 본토와의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고, 독도는 외로운 고도가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경비대원인 순경 한사람이 급성맹장염으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으나 통신 마져 끊어진 독도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고귀한 생명이 위태하다. 이대로 구경만 것인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햄들 사이에 묘안이떠올랐다

그들은 그들의 무전기를 해체하여 소형의 전지식 송신기를 즉석에서 만들어 냈다. 그리고 휴대용 전등의 전지를 뽑아서 응급용 송신기를 동작시켰다. 수신기는 오락용 래디오로 대용했다. 다행이 라디오는 단파를 들을 수가 있는 웨이브 래디오였다.

이렇게 하여 어린 CQ 독도를 떠나 본토를 찾아 날라갔다. 출력이래야 불과 l왓 내외의 미약한 전파에 한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전파가 본토까지만 전달된다면..., 아니 독도 밖의 어느곳에서든 수신되기만 하면 한사람의 생명이 구원되는 것이다. 정성어린 CQ 응답해 것은 의외에도 대구에 었는 경상북도 경찰국이었다.

발전기의 고장으로 통신 불가능임을 통보하고 응급환자가 있음을 알렸다. 기적적인 교신이 끝난지 8시간후, 무서운 풍랑을 무릅쓰고 구호선이 독도에 도착, 위기에 직면했던 경찰관은 무사히 구출되었고, 발전기도 대체되어 독도로 부터의 통신이 재개되었다. 후에야 일이지만 몇 시간만 연락이 늦었어도 환자는 살아 남기 힘들었으리라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196l 겨울의 눈보라가 휘날리던 어느날, 일본 니이가다시에서 30킬로 떨어진 산골짜기 속에서 위급환자가 발생했었다. 워낙 중환자라 시골의사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고, 아무래도 그날 중으로 니아가다까지 가야만 살수 있다는 진단이 내렸으나 밖은 눈보라 때문에 헬리콮터도 수가 없었다.

햄들은 활동을 개시했다. 우선 산골의 햄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니이가다의 햄은 즉시로 근처의 햄들을 동원, 속의 햄과 상시 연락을 취하게 하는 한편, 니이가다 산악회에 연략하여 산악회의 후원하에 구조대가 산속을 향해 출발 했다. 구조대에게 휴대용 무전기를 둘러멘 햄이 따랐고, 한펀 병원에 연락하여 수술준비를 하고 대기하도록 해 놨다.

한편 산골에서는 니이가다에서 구조대가 떠났다는 연락을 받자, 자기네도 가만히 앉아 있을 없다고 썰매에 환자를 싣고 역시 휴대용 무전기를 둘리 멘 햄이 뒤따르며 구조대가 오고 있는 쪽으로 출발하여 눈보라를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환자병원에 도착 할 때까지 환자의 증상은 시시각각으로 병원에 연락되었고, 저녁 어둠이 깃든 니아가다에 환자가 도착했을 때에는 병원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서, 수술을 시작,환자를 무사히 구출할 수가 있었다.

예를 하나하나 든다연 한이 없다. 햄들은 언제나 법률로 허가된 한도내에서 전파를 통하여 서로 도우며 우애 운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것이 전세계 햄들의 공통된 자랑이기도 것이다.

국 아마추어 무선연맹에는 AREC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아마추어 무선 비상통신단(Amateur Radio Emergency Corps)"이라는 것으로, 자원에 의한 햄들의 조직이다. 이들은 평소부터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전국적인 통신망을 조직하고 있으며, l년에 두세번씩 가상적인 비상통신훈련을 실시 함으로써 만일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규모에 있어서는 미국의 AREC 만한 것은 못되지만, 어느 냐라든 모두 이런 비상통신망은 만들어 놓고 있으며, 모든 햄은 언제나 국가와 사회의 요구가 있을 날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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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