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다를 건너

 

"크리스찬 짹"이라면 햄보다도 영화 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 감독이다, 이 "크리스찬 짹"이 제일 먼저 햄들의 국제적 우애활동을 스크린에 옮겨 "만일 세계의 모든 사람이" 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l955년도 프랑스 우애상을 수상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아마츄어 무선연맹인 REF 협조하고 있어, 여러나라의 햄들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노력을 그려내고 있다. 뚜렷한 주연 배우도 없으며, 원자무기나 도탄의 공포에 떠는 현대에 대하여 유네스코 정신의 구현이라고 격찬을 받은 영화의 스토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곳은 노르웨이의 해안으로 부터 직선 거리로 2일쯤 걸리는 북빙양상. 여기에 척의 어선이 나가 있었다. 배는 프랑스 부리다니 반도의 어선 "류테스호"로 승무원은 중년의 선장 " 케렉크"와 l2명의 어부로, 모두 이렇다 할 화제에 올라본 일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였다.

그런데 배의 어부중 하나가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렸다. 계속해서 또하나. 배에는 의사가 있을리 없다.

선장은 무선으로 각지를 불러 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알아 보려고 했으나 아무으로 부터도 응답이 없었다. 무전기가 고장이 났기 때문이였다. 그럭 저럭 갈팡 질팡하는 동안에 어부는 하나씩 둘씩 쓰러지고 남은 것은 선장과 2 운전사, 그리고 아라비아인의 "모하메트"뿐이였다.

"배에는 악마가 붙었다"

2 운전사는 이것을 안의 유일한 이방인 "모하메트"에게로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배의 선장은 햄이었고, 배에는 선장의 아마츄어국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으 세계의 햄들을러보면 세계의 어느 곳의 햄이든지 응답해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선원을 살리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선장의 정성어린 CQ 북빙양상의 "류테스호"로 부터 멀리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아프리카의 토인 부락 "토고랜드"(황금해안 근처) 있는 "앨버어트"라는 백인 햄에 의하여 수신되었다. 그는 국민학교 선생에게 부탁해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한편, 곳에 주재하고 있는 관리의 힘을 벌려 정글 속을 순회중인 군의관 "제구아"를 불러다 위기에 처한 "류테스호"와의 연락을 취했다. 그리하여 군의관은 선장과의 햄의 전파를 통한 진단으로 병의 원인이 쇠고기 중독이라고 판정하였다.

"류테스호"에는 한명의 아라비아인인 "모하메트"를 제외한 (그는 회교도이므로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전원이 쇠고기를 먹었으므로 모두가 중독을 일으키고 있었다. 회교도인 "모하메트"만이 그것을 먹지 않은 것이 눈에 거슬렸던 2 운전사는, 끝까지 "모하메트" 때문에 악마가 붙었다고 그를 두들겨 주었다.

때의 시간은 저녁 7 40. 내일 아침 8시까지 혈청주사를 놓지 않으면 선원의 생명이 위험하다. 그러나 주사할 혈청은 빠리의 "파스츄어" 연구소에 밖에 없다. 군의관은 배를 현재 위치에 정지시킬 것을 명령하고, "앨버어트"는 "CQ 빠리"를 불렀다. 이것을 수신한 것은 빠리의 l8세되는 소년 " 루이". 그는 아프리카의 군의관의 지시에 따라. 군의관의 선배이며 "파스츄어" 연구소의 중진인 "라르고"박사의 자택으로 수쿠우터를 몰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라르고"박사는 1주일 전에 별세한 후였고, 슬픔에 잠긴 "크리스티"부인은 자신의 슬픔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정신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이였다. "루이" 소년은 시간이 촉박하고 열세명의 생명이 걸려 있음을 설복하였고, 미망인도 드디어는 "루이" 소년의 열성에 감동하여, 사람은 "파스츄어" 연구소로려가서 드디어 혈청을 손에 넣었다.

사람은 그길로 "오루리" 비행장으로 달려 갔으나, 엄격한 규칙은 손쉽게 혈청을 실어다 주지 않았다. 그럭 저럭 하는 동안에 북행의 비행기는 없어지고 " 부르제" 비행장으로 부터 독일 "뮨헨"행의 비행기가 있음이 알려졌다. 그래서 "크리스티" 부인은 비행장으로 나가고, "루이" 소년은 집으로 달려와서 "CQ 뮨헨"을 불렀다. 물론 뮨헨에도 있었다. 이것을 수신한 것은 전쟁으로 장님이 "카알"이라는 노인 햄이였다. 장님이기는 하나 훌륭한 햄의 일원인 노인도 눈뜬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녁때의 시간을 햄들과의 잡담으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카알" 노인과의 연락은 되였으나, 혈청은 뮨헨행의 비행기를 놓쳐 버리고 베르린행 폴랜드 비행기의 스츄어데스에게 말겨져 버렸다.

한편 뮨헨에서는 "카알" 노인이 비행장까지 보았으나 혈청은 도착되지 않았다. 낙심하고 집에 돌아온 노인에게 빠리 "루이"로 부터 또다시 연락이 왔을 때에는 l2시가 넘었을 때였다.

"혈청은 베르린으 갔다"

"카알" 노인은 미군병원에 근무하는 딸의 힘을 빌려 베르린에 있는 미국 공군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수없이 계속된 우애의 바튼은 여기서 미국 공군의 "빗치" 중사에게 넘어온 것이다. 그는 소련지구로 몰래 숨어 들어가 폴랜드 비행기의 스츄어데스로 부터 혈청을 인수 받는데는 성공했으나 돌아 오는 길에 쏘련군의 보초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빗치" 중사는 쏘련군 대위에게 사정했다. 하늘과 바다를 건너온 인간애를 열심히 설명했다. 쏘련군 대위도 인간임에는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혈청은 돌려주지 않았다.

"비행기는 쏘련에도 있읍니다"

래서 혈청은 쏘련비행기를 타고 코펜하겐으로, 거기서 프랑스 비행기로 오슬로까지 날랐고, 오슬로에서는 노르웨이 비행기가 "류테스호"를 찾아 떠났다.

"혈청이 도착한다" 

소식은 베르린에서 뮨헨으로 거기서 다시 빠리의 "잔 루이"에게로, "잔 루이"는 "앨버어트"에게, 그리고 거기서 다시 "류테스호"로 릴레이 되어 전달되었다.

그지음 배에서는 이미 선장마져 쓰러지고, 최후까지 2 운전사가 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배를 상선의 항로까지 끌고가면 지나가는 배에게 구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선장의 명령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숨차서 허덕이는 선장에게 마지악 한대의 캄풀 주사를주자 약간 정신이 돌아온 선장은 정선 명했다.

이렇게 하여 북빙양의 바다 위에 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류테스호"는 한발 한발 다가오는 죽음을 눈앞에 사람들을 태운채 표류하고 있었다.

이때야 비로소 무선국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노르웨이에서도, 다른 통신을 제한해 가면서 "류테스호"의 수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노르웨이의 비행기가 혈청을 싣고 출발했을 때, 최후까지 생기가 있었던 2등 운전사가 서투른 솜씨로 무전기를 동작시키고 있었고, 드디어 노르웨이 비행기와의 연락에 성공했다.

구름은 얕고 시야는 좁았다. 노르웨이 비행기는 미터 저공까지 기수를 얕이 하여 배의 상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리하여 혈청은 투하되였으나, 배에서 약간 떨어진 바다속에 떨어젔다. 용감하게 살을 에이는듯 한 바다 속에 뛰어든 것은 혼자 고기를 먹지 않았던 회교도의 "모하메드"였다.

그로부터 1주일 , 이러한 국경을, 그리고 민족을 초월한 인간애는 헛되지 않아 "콩카르노항"에는 일제히 선원들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인파가 밀려 닥쳤다. 라디오 방송은 심히 실황을 중계방송하였고, 아프리카에서도 빠리에서도 뮨헨에서도 그리고 베르린에서도 열세명의 목숨을 구출한 사람들이 감격속에 방송을 듣고 있였다.

"단 하룻밤 동안에 선의의 고리를 연결하기 위하여 손을 맞잡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중계방송의 마지막 아나운스먼트였다.

햄의 세계에는 국경이 없다. 이것을 묘사한 것이 영화다. REF 협조하고 있으므로 햄의 묘사는 생생하여, XYL(부인)로부터 "또 무선입니까?"라고 핀잔을 받으면서도 애기 앞에 주저앉는 아프리카의 햄, 직장에서 돌아오자 타이도 풀기전에 우선 수신기의 스위치부터 트는 빠리의 , 세계적으로 인기를 영화였다.

영화가 일본에는 제작되던 해에 수입되어 대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영화 덕에 아마추어 무선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가 빠리에서 개봉된지 얼마 안되는 어느 날, 일본의 햄이 빠리의 햄을 만났다.

"빠리에는 지금 햄의 영화가 상영되어 대인기인데 일본에 수입해보지 않겠느냐?"

일본의 햄은 몇몇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영화사로 쫓아갔다. 영화사에서는 유사 이래 지금 까지 자기들 보다 먼저 영화내용을 알고 수입하자는 것도 처음보는 일이였고, 빠리에서 개봉된지 며칠도 안되어 일본서 수입하자고 찾아 왔으니, 인기는 가히 알만하다고 수입하기로 했다. 이래서 영화는 일본아마추어무선연맹의 선전과 일본 햄들의 선전으로 일본서도 대인기를 끌었다.

그러연 한국에서는? 불행히도 l955년이라면 한국에는 아마추어 무선국이 허가되기 전이었고, 소식은 일본에 수입된 후에야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한국의 햄들 몇몇이 "우리도 수입하자." 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영화란 연애가 있거나 전쟁이 있어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한국의 영화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한국의 후진성 덕택이라고나 할런지? 어쨌든 영화는 결국 현해탄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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