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마추어 무선
한국에서의
아마추어 무선은 지금으로 부터
약 40년전인 일제시대에서
부터 시작되였다. 그
때에는 물론 HL이니 HM이니
하는
한국을 나타내는 전치부호는
없었고, 일본을 표시하는
J라는 호출부호로 J8AA에서
J8OZ까지가 조선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대부분이 일본
사람이였고,
그 틈에서 불과
수명의 "조선 사람"이
아마추이 무선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랴졌다.
l945년
해방과 함께 이
땅에는 미군들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거나
아마추어 무선의 전파를
내야만 견디는 이들
미군들이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햄의 전파를 냈다.
"CQ, CQ, Here is HL1AB
… "
해방
덕택에 우리 나라에
할당된 HL이라는 콜
사인은 우리가 한번도
써 보기도 전에
외국인의 손으로 먼지
전세계에 펴졌다. 누가
허가를 해줬는지? 아니면
무허가였는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여하간 HL의 전파는
우선 미군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속에서 한두명의 한국 사람이
몰래 HL의 콜
사인으로 무허가 전파를
냈다가 MP 의 포위를
받기도 했다.
몇년후,
우리 나라에는 우리의
정부가 세워졌다. "이제는
허가 해 주겠지"하고 기다릴
여가도 없이 625사변이
일어났다. 아마추어 무선은
결국 한 두
사람의 입에만 오르내린
채, 별로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살아 져야만
했다.
이러한
불행한 민족의 수난사와
같이 묻혀 있던
아마추어 무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휴전이 성립되고 얼마 후
부터였다. 전쟁이 우선
멎고 총소리가 안
들리게 되자, 이
땅의 아마추어 무선의
선구자들은 개인적으로 정부와
교섭을 시작 하여,
아마추어 무선국의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단파
즉 스파이"라는 과대망상증에
결린 한국에서 이것이
쉽사리 성공할리 없었다.
허가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이들 선구지들은
무허가로 전파를 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 수는
차차 늘어갔다. 자칫하면
스파이로 걸리고, 걸리면
공산당과 연관 지어 위태로운
일이였지만 아마추어 무선이
간첩에 이용 된것은
아마추어 무선사 70여년에
한번도 없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로
전파를 보냈다.
"코리어에서는
언제 햄이 나올라나?"
기다리든
전 세계의 햄들은
열열히 이들을 환영했고,
그들은 곧 유명해젔다.
그러나 숨어서 하는
일이 길 수는
없어, 그 중
여러명이 흑은 경찰에,
혹은 헌병대에, 흑은
전파감시국에 적발되어 처벌을
받기도 했다.
l954년
여름. 무허가로 몰래
전파를 내던 햄들과 전파도
못 내고 안타까워
하든 햄들은 드디어
단체의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햄들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나섰다. 그리히여
햄들이 제일 많았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약
반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l955년 4원 20일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의
창립총회를 열고
동국무선고등학교의
교실을 하나 빌려
KARL(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Korean Amateur Radio League)의 결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무선계의 최초의 단체로
전파협회보다도 3~4년이나
빨랐고, 전자공학회 보다는
7~9년이나 빨랐다.
그
당시
창립총회에 모인 회원수는
불과 40~50명. 대부분이
고등학교나 대학의
학생들이였다.
초대 이사장으로는 공보처
방송관리국의 기감인 이인관씨가
선출되어, 학생들의 지도에
발벗고 나서 주셨다.
KARL의
제1차적 임무는
물론 아마추어 무선의
개방이였다. 다음은 아마추어
무선을 일반에게 널리
인식시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뿌리깊이 박혀있는
"무선공포증"을 치료해
주는 일이였다.
회원의
대부분이 학생인 KARL의
재정은
처음부터 말이 아니었다.
우선 이사들의
포켓을 털어서 기관지
"KARL"을 발행했다.
활자 인쇄는 생각도 못했고,
프린트나마
프린트 집에 맡기지도 못하고,
열성분자(?)들의 손으로
등사판을 긁고 밀고 제본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누가
돈주고 하라면 안할
것"이라고 웃으며 일했다.
단 하나 "아마추어
무선"을 개방시켜 보겠다는
파이오니어 정신만이 그들의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한편
KARL은 단체의 이름으로
당국과의 교섭에 냐섰다,
무었보다 주무관청의
관리님들 조차 아마추어
무선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의
옛날(이래야 근
20년 전이지만) 이야기이니
선뜻 허가해 줄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졸랐다.
그
당시의 한국의 전파계는
소위 "무선전신법"이라는
40여년전의 일본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어 "아마추어
무선"이리는 단어 조차
찾아 볼수 없었다. 그래서
KARL은 실험무선국이리는
이름으로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KARL이
창립된지 한달 후,
당국은 개인적으로는 곤란하나
학교로 허가해 주겠다는
태도를 결정하여, 첫번째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실험무선국 HL2AA가
허가되었고,
그 뒤를 이어
연세대학교에, 동국무선고등학교에,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갔다. 명칭이야
실험무선국이건 아마추어
무선국이건 마음 놓고 정식으로
전파를 낼 수
있다는 자유감으로 햄들은
실험무선국으로 쏠렸다.
각 실험무선국은 매일
매일 햄들의 전파를
발사했다. 꼬박 추운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는
햄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마추어 무선이란 원래
자기 집에 설치해
놓고 심심할 때
즐기는 것이 원칙인지라,
개인국에 대한 소원은
점점 더 강해만
갔다.
그러던
중 l958년도 저물
무렵, 햄들은 한
가지 소식으로
흥분했다. 우리에게는 허가해
주지 않는 아마추어
무선국이 미국인에게 세국이나
허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체신부는
대한민국의 체신부냐?
미합중국의
체신부냐?"
"한국에서
아마추어 무선국의 허가를
받으려면 미국의 시민권을
먼저 얻어 와야겠다."
"우리
전파 데모를 하자.
당국에 사전통고를 하고
일제히
무허가
전파를 내고, 잡아가면
잡혀가자"
혈기왕성한
학생들은 저마다 흥분하여
분해 했다.
KARL도
항의서를 제출했다. 드디어
당국은 우선 허가에의
제l단계로
KARL 앞으로 단체국 형식의
아마추어 무선국을 허가해
주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반년이나
지난 l959년 6월
2일.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이사장 앞으로
실험무선국이 아닌 한국 최초의 정식 "아마추어
무선국
HL9TA"가 허가되었다.
1959년
7휠 l9일. 최초의
전파가 맑게 개인
하늘로 퍼져 나갔다.
"CQ, CQ,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의
HL9TA...."
이
역사적인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햄들의 감격은 말할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도 국제무대에 외국과
나란히 CQ 를 부르게
됐구나."
하는 감격에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렸다.
드디어 단체의 힘으로 험악한 아마추어 무선국 개방에의
길을.....
그러나
아직도 남은 일이
있었다. 개인국의 허가다.
KARL은 끊임 없이 당국과의
절충을 계속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 자격시험을 위한
강습회도 열었다.
이듬해인
1960년에 들어섰다. 당국도
차차 개인국의 허가를
해주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6월 부터는 드디어
개인 아마추어 무선국의
허가신청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한편 KARL은 HL9TA 외에
또
하나의 이동용 아마추어
무선국을 신청하여, 이것이
8월 l일자로 HM9A라는
콜 사인으로 허가되었고,
이 때 부터 한국인의
아마추어 무선국은 HL 대신에
HM이라는 호출부호를 쓰게
되였으며, HL9TA는 HMφHQ(φ는
제로, 즉 영으로
영어의 0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햄들은 사선을
하나 더 긋는다)로
콜 사인이 바뀌었다.
HM9A의
허가를 받은 KARL은
다섯명의 회원에게
HM9A를 들려
제주도로
파견했다. 목적은 한국에서의
아마추어 무선의 완전 개방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고,
콜 사인이 HL 에서
HM으로 바뀌었음을 알리고자
함이였다. 제주도로 간
HM9A는 목포, 제주,
서귀포, 부산, 대구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파를 발사하여, 1O일
동안에
약 30개 나라의 햄들과
교신하며
한국의 아마추어 무선계의
소식을 전했다.
한편
6월에 접수된 개인국의
허가신청은 하나 하나
경찰의
신원조사를
받고, 9윌 3일에야
허가가나오기 시작했다.
이날을 기다리기 5년여,
이 때 부터가 한국
아마추어 무선계의
스타아트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두번
허가 사무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아마추어 무선국은
꾸준히 증가하여 이제는
100여국의 아마추어 무선국이
생기게
되었고, 수백명의 아마추어
무선기사 면허 합격자가
나오게 되었으니, 10년 전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1963년
l1월 경북궁 미술관에서는
제6회 과학전람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KARL은
이
과학전람회에 이동용 아마추어
무선국을 이동운용시킴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아마추어
무선국이 일반 시민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과학전람회에
모인 관람자들의 인기를
독점한 이 아마추어
무선국의 공개 운용장
앞에는 매일 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마음대로 외국과
교신하며 잡담을 하는 햄들의
묘기(?)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 부터 매년
KARL은 HM9A를 과학전람회에
공개 운용하여 일반에게
아마추어
무선을 소개해 왔으며,
앞으로도 해마다 공개될
것이므로 과학전람회장에만
오면 누구든지 아마추어
무선국의 실제 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KARL 이동국 HM9A의
활약은
컸다. 1962년 2월에
실시한 독도 원정 운용은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그 외
뚝섬으로, 대천으로, 또다시
제주도로, 국내로는
일반시민에게
아마츄어 무선을 소개하고,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아마추어
무선계를 과시하여 왔다.
현재
우리 나라 아마추어
우선국의 수는 약
백여국이다. 그 중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
지방에는 아마추어 무선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부분품을
살수 없는 것이
큰 이유로, 아직은
별로 없다. 현재
아마추어 무선국이 있는
곳은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광주,
전주, 합천, 충무,
평택, 장호원, 소사
등이다.
햄들의
대부분은 대학생으로, 따라서
외국의 햄들과 같이
무선국 시설에 몇
십만원, 몇 백만원씩
들일 수는 없고,
기껏 몇 만원정도의 투자로
최소한의 무선시설을 해놓고
있다.
몇번
되풀이 하지만 아마추어
무선은 하나의 취미다.
그러나 다른 취미와
달리 과학을 하는
취미이며, 국제 무대에서
민간 외교의 일부를 담당하는
국가의 위신과 관련되는
취미이다.
아마추어 무선이 활발할
수록 그 나라의
무선계를 비롯한 과학이
발전 한다. 우리 나라의
현실은 유능한 기술자를
대량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이론과 실제를 겸한
햄들 만큼 유능한
기술자도 드믈것이다.
햄은 이론가이기만 해서도
안되고 실제기술만 가지고도
한계가 생기기 때문에,
자연히 양쪽을 모두 공부하게
된다. 국가정책으로 장려해도
국가적으로 이익이겠지만,
취미에 국가 예산을 달랄
수도 없고, 사회적인
독지가나 나와 줬으면
좋겠지만, 아마추어 무선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대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드디어 HAM국은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에게 허가된 미국인
아마추어 무선국이
약 50여국이나 있다.
그 중에는 전
주한 미대사였든 "포오터"
대사도 HL9AA라는 콜
사인으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운용하였었지만 그들은 흘륭한
시설을 가지고 있으으로
DX와도 교신이 잘
되고, 마치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무선계는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것 같이
외국에 알려져 안타깝기
한이 없다. 우리도
몇몇은 그들과 맞설
시설로 유럽이나 아프리카와도
매일 같이 교신하여 우리의
위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워낙
수적으로 당할 수가
없다. 기술로는 얼마든지
대적할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도
그들과 맞서게 될런지?
KARL의
본부 무선국 HMφHQ
와 HM9A가 송수신기가
없이 수년간 회원들의
간단한 송수신기를 빌려
쓰다가, 미국인 햄
HL9KC 홈스씨가 새
송수신기를
사고, 쓰던 것을
기증해 주었고, 또
전 미8군
부사령관이었던 칸웨이중장이
본국으로 전입되어 귀국할
때, 자기가 쓰던
송수신기를 기증해 주어서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시설을 갖추게 된것은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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